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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기의 유물 ‘FP-45 리버레이터’. /사진=위키미디어 |
FP-45 리버레이터(Liberator, 해방자). 1942년 나치 치하의 유럽 각국 레지스탕스를 위해 미 육군이 GM에 의뢰해 양산한 제작단가 2.1달러의 초저가 권총이다. 장탄 수가 1발에 불과하고 지나치게 짧은 총신에 강선도 없어 사거리가 15미터에 불과한 ‘1회용’ 무기로 완성도가 지나치게 낮다보니 실제 전선에선 거의 활용되지 못했고 전쟁 후 대부분 폐기되거나 바다에 버려졌다.
역사의 한켠으로 사라진 이 무기가 다시 부활한 것은 70여년 후인 지난 2013년 5월의 일이다. 미국의 20대 청년 코디 윌슨이 설립한 비영리단체 ‘디펜스 디스트리뷰티드’(Defence Distributed)가 ‘리버레이터’라는 명칭의 3D 프린팅 권총 설계 파일을 온라인에 무료로 공개한 것.
◆70여년 만에 부활한 ‘해방자’의 총
외형도 재질도 다르지만 두 총기의 기본적인 골격과 설계사상은 매우 유사하다. 신형 리버레이터 역시 오리지널과 마찬가지로 단 1발 밖에 장전하지 못하고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탓에 1회 발사하면 총기가 파손된다. 명중률도 사정거리도 함량 미달이고, 발사 과정에서 소유자가 부상을 입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한 마디로 ‘불량 총기’다.
실제로 호주 경찰이 3D 프린터를 이용해 리버레이터 2정을 만들어 테스트한 결과 1정은 인체 모형에 17cm의 상처를 냈지만 나머지 1정은 초탄을 발사하자마자 총구가 파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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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프린터로 제작된 리버레이터 부품들. /사진=위키미디어 |
얼핏 보면 별 일 아닐 수도 있는 이 총기의 등장에 미국 정부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국무부는 국제무기거래규정(ITAR, International Traffic in Arms Regulations) 위반이라며 윌슨에게 파일을 공개하지 말라고 통지했다. ‘세계 최초 3D 프린팅 총기’의 무분별한 유포가 가져올 위험성을 경계한 것.
하지만 이미 설계 파일은 P2P 방식 파일 공유 프로그램인 토런트(Torrent)를 통해 온라인에 대대적으로 유포된 상태였다. 공개와 동시에 10만건의 다운로드가 이뤄졌고 세계 각지에서 리버레이터를 제작, 테스트한 동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다수 공개됐다. 지금 이 순간도 다양한 토런트 공유 사이트에서 산발적으로 리버레이터 파일이 공유되고 있다.
윌슨은 국무부를 상대로 재판을 걸었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미국 수정헌법 제1조와 총기 소지의 권리를 주장하는 제2조, 재산권의 보장을 규정한 제5조를 근거로 리버레이터 설계 파일 삭제 명령은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 주장했다.
3년에 걸친 지리한 논쟁 끝에 지난 9월 미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졌다. 결론은 ‘금지’. 미국 내에서 3D 프린터로 제작가능한 총기 설계 파일을 공개하는 일체의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적국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이 설계 파일을 이용할 경우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고, 이는 언론의 자유 보장보다 심각한 문제라는 국무부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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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리버레이터. /사진=위키미디어 |
◆미국보다는 한국에 위협적이지만…
하지만 전문가들은 3D 프린팅 총기의 위험성이 미국 내에서 과대평가된 감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미 3억7000만정의 총기가 개인 소유인 나라에서 조악한 완성도의 3D 프린팅 총기를 사용하는 위험을 감수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게다가 개인이 3D 프린팅 총기를 사용하기 위해 투자해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다. 3D 프린터와 재료의 비용, 제작 기간 등을 감안하면 총기판매점에서 진짜 총을 구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반면 일본이나 한국처럼 개인용 총기 소유가 엄격하게 제한된 국가들에서는 3D 프린팅 총기가 새로운 사회적 위협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충분한 것으로 지적됐다. 실제로 지난 2014년 5월 일본 카나가와 현에서 3D 프린터로 총기를 제작한 20대 남성이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국내에선 아직 3D 프린팅 총기를 제작, 사용한 사례가 확인되지 않았다. 대신 전통적인 방식의 ‘사제 총기’로 인한 사고는 종종 발생한다. 지난 10월19일 발생한 ‘오패산터널 총격사건’이 대표적이다. 김창호 경감이 순직하고 시민 2명이 부상을 입은 이 사건에서 범인 성병대(46·남)는 쇠파이프와 목재, 쇠구슬로 만든 사제 총기 6정을 제작,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총기와 유사하게 제작된 BB탄 총기를 개조해 살상력을 높인 ‘사제 BB탄 총기’도 규제대상이다. 경찰에 따르면 일부 서바이벌동호회 회원들 사이에서 최대 11배까지 성능을 강화해 자동차 유리 정도는 손쉽게 깰 수 있는 BB탄 총이 사용되는데 쇠구슬 등을 탄환으로 사용할 경우 인명 살상도 가능하다고 한다.
반면 3D 프린팅 총기의 경우 국내에서는 사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탄알과 화약의 입수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리버레이터는 ‘.380ACP탄’을 사용하며 다른 3D 프린팅 총기들 역시 탄알까지 3D 프린터로 제작하지 않는다.
3D 프린팅 업체 관계자는 “국내에서 공기총 탄알은 총포사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지만 화약이 군수물자로 엄밀히 관리되는 만큼 심각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앞으로 3D 프린팅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 조만간 살상력 높은 사제 총기가 3D 프린터로 제작될 수 있다”며 가능성을 열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