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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4월14일. 초호화 여객선 RMS 타이타닉호가 북대서양을 떠다니는 빙산과 충돌해 침몰했다.
북대서양 횡단 여객선인 타이타닉호는 1912년 4월10일 첫 항해를 시작했다. 영국 사우스샘프턴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중 4월14일 빙산과 충돌해 서서히 가라앉았다. 타이타닉호는 결국 다음날 오전 2시쯤 바다 아래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이 사고로 1513명이 사망했다.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는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해양 참사 중 하나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절대 가라앉지 않는 '불침선'… '일각'의 빙산에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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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업체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RMS 올림픽호를 시작으로 세 척의 올림픽급 여객선을 운용했는데 타이타닉호가 그 중 하나였다. 타이타닉호는 1909년 건조를 시작해서 1911년 5월31일 진수됐다.
타이타닉호는 영국 초호화 여객선으로 4만6000t급에 길이 270m, 폭 28m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였다. 심지어 최첨단 기술을 총동원해 만들었다. 이중바닥, 16개의 방수격실, 특정 수위가 되면 자동으로 닫히는 문 등이 설치돼 절대 가라앉지 않는 배 '불침선'으로 불렸다.
출발 당시 승선 인원은 2223명으로 매우 부유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새로운 삶을 찾아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들이었다. 선내에는 체육관, 수영장 그리고 호화로운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항행 중이던 타이타닉호는 다른 선박으로부터 '빙산이 떠다니니 조심하라'는 경고 메시지를 수차례 받았다. 그러나 이 전보들은 타이타닉호의 무전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사고 이틀 전 고장났던 전산장비 탓에 통신기사가 판독해야 할 메시지가 쌓여 있었고 무선 통신기사는 승객의 메시지를 중계국을 통해 타전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선원들은 인근에 얼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했지만 파도가 잔잔하다는 이유로 경고 메시지를 무시한 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빙산 발견 후부터 충돌까지 '37초'… 아수라장된 갑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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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4월14일 오후 11시40분. 당직을 서던 갑판선원 프레드 플리트는 전방 450m에 높이 20m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 그는 즉시 기관실에 '전속 후진' 신호를 보내고 조타수에게 "최대한 우현"으로 배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타이타닉호는 배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했으나 배의 회전반경이 너무 크고 빙산과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충분한 회전과 감속을 하지 못했다.
결국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충돌했다. 플리트가 빙산을 발견한 지 37초 뒤였다. 곧바로 주갑판이 함몰되고 우현에 구멍이 났다. 그 구멍으로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타이타닉호는 방수용 격벽이 설계돼 있었고 문들도 물을 차단할 수 있도록 설계됐으나 낮은 수온에 노출되면서 내구성이 악화됐다.
갑판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은 긴급탈출 명령을 내렸다. 승객들은 서로 탈출하기 위해 구명정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구명정은 단 20척밖에 없었고 최대 정원은 1178명이었다. 탑승 인원의 절반은 사고가 발생해도 애초에 구명정에 탑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월리스 하틀리와 그가 이끄는 7명의 오케스트라 단원은 아수라장이 된 배에서 동요하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갑판이 기울어 서 있을 수 없을 때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이 단원 가운데 구조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관사들과 화부들은 승객을 탈출시키기 위해 전기를 작동시키는 작업을 하다 최후를 맞았다. 스미스 선장도 끝까지 남아 배와 운명을 같이 했다. 구명정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은 영하 3도인 바다에 뛰어들었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무전기사는 긴급 구조 신호를 계속 타전했다. 하지만 근처에 있던 캘리포니아호의 무전기사는 자고 있었기 때문에 구조 신호를 수신하지 못했다. 뒤늦게 달려온 RMS 카르파티아호가 구명정에 탄 706명만을 구조할 수 있었다.
타이타닉호 침몰… "절대안전"의 중요성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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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는 2시간40분만에 두 동강이나 3800m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1500여명 이상이 차디찬 물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역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로 꼽히는 타이타닉호의 침몰. 이 사고는 산업혁명에 따른 문명의 진보에 낙관적인 희망을 갖고 있던 서구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인류가 자연을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 것이다.
이 사고를 계기로 선박·항해의 안전성 확보에 대한 조약 형태의 국제적 결성 움직임이 일어났다. 1914년 1월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회의"를 열어 13개국이 참가했으며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조약이 채택됐다.
영국은 구명보트 구비 기준을 톤수에서 총 정원으로 변경했다. 그 후로 여러 배가 조약에 따라 구명보트를 늘렸다.
긴급 상황을 의미하는 통신용어 메이데이가 이때 등장했다. "구해 달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인 'venez m'aider' 의 뒷부분에서 몬더그린 현상이 일어나면서 정착된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