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 사건을 묘사한 그림. (출처: François Dubois, 1572,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57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새벽, 프랑스 파리는 피로 물들었다. 종교 화합의 제전이라 믿었던 결혼식이 끔찍한 학살의 서막이 된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 가톨릭과 위그노(프로테스탄트) 사이에 깊게 드리워진 종교 갈등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1562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종교 전쟁은 가톨릭과 위그노 양측의 대립이 격화되며 8차례나 이어졌다. 가톨릭의 기즈 공작과 위그노의 콜리니 제독이 각각의 세력을 이끌었고, 특히 위그노를 박해하려는 왕실의 정책은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1570년 생제르맹 조약으로 평화가 찾아왔지만, 이는 일시적인 봉합에 불과했다.


프랑스 왕실의 모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가톨릭과 위그노의 화해를 도모하는 명분으로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와 위그노의 실세인 나바라의 앙리(훗날 앙리 4세)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 결혼식은 실제로는 위그노 지도부를 한자리에 모으기 위한 함정이었다.

결혼식이 열린 8월 18일, 파리에는 수많은 위그노 귀족이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그러나 22일 위그노의 최고 지도자 콜리니 제독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발생했다. 그 배후에는 기즈 가문과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있었다. 이 암살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로 인해 위그노 세력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왕실은 위그노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선수를 쳤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아들 샤를 9세를 설득해 위그노 지도부 제거를 명령했다. 24일 새벽 3시,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학살이 시작됐다. 콜리니 제독은 살해당했고, 다른 위그노 지도자들도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파리의 가톨릭 신자들도 합류해 위그노를 향한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다.


학살은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 사건으로 수천에서 수만 명의 위그노가 희생됐다. 이 비극적인 역사는 종교를 명분으로 한 권력 다툼과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