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난해 12월13일. 삼성그룹이 사상 최대 규모인 500여명의 임원 승진인사를 단행하면서 고졸 출신 김주년 삼성전자 부장을 상무로 승진시켰다. 1986년 고졸 제조직으로 입사한 그는 신개념 유저인터페이스(UI), 아몰레드 디스플레이 등의 신기술을 개발한 공로로 남보다 2년 먼저 상무로 승진했다.
‘고졸 신화’라는 말이 있다. 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신화' 같은 존재를 평가할 때 주로 거론되는 용어다.
은행장 10년에 이어 10년 가까이 신한 금융지주를 이끌었던 라응찬 전 회장이나 드럼 세탁기를 국내 기술로 개발한 조성진 LG 부사장, 한국BMW를 맡아 전 세계 지사 가운데 가장 빠르게 성장시킨 김효준 대표 등이 대표적인 ‘고졸 신화’들로 꼽힌다.
작년 10월 김황식 국무총리와 간담회를 가졌던 강석창 소망화장품 대표와 윤생진 선진D&C 사장, 김영모 대한민국명장회장, 김하수 삼성전자 상무 등도 신흥 고졸 신화의 주역으로 회자된다.
사실 고졸 신화의 대(代)는 1990년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후 한참이 끊겼다. 과거 고졸자들이 해왔던 일을 대졸자들이 대신하면서 고졸 직원들은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먼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은행, 대기업, 공공기관과 같은 안정적인 직장의 경우엔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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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고졸 위상…고졸 약진, 대기업 '고졸찾기' 후끈
하지만 최근 기업시장에선 ‘제2의 고졸 신화’ 붐이 재현될 분위기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금융권과 대기업, 공공기관들이 앞다퉈 고졸 채용에 적극성을 띠고 있다. 시중은행들이 고졸 행원들을 다시 뽑기 시작했고 제조업과 유통, 서비스업을 계열사로 둔 대기업들의 우수 고졸자 확보 경쟁도 본 궤도에 올랐다.
고졸채용의 열풍을 지핀 쪽은 아무래도 금융권이다. 기업은행은 지난해 특성화고 출신 20명을 창구 직원으로 채용했고 1997년 이후 고졸 채용을 중단했던 산업은행도 15년만에 방침을 바꿔 올해 50명의 고졸 출신 사원을 뽑기로 했다. 은행연합회는 18개 국내 은행이 2013년까지 3년간 고졸인력을 2700명 이상 뽑을 계획이라고 공표까지 했다.
대기업군에서는 한화그룹이 동반성장의 기치를 내걸며 ‘고졸채용’ 붐을 주도하고 있다. 한화는 고졸과 초대졸 신입사원 수를 지난해 2800명에서 올해는 3700명까지 늘리기로 했는데 이중 오는 3월 공채 500명, 채용전제형 인턴 700명 등 총 1200명을 고졸 신입사원으로 채우기로 했다.
올해 처음 고졸 공채를 선발하는 삼성의 가세도 눈부시다. 삼성그룹은 올해 고졸 공채로만 500명 이상을 선발, 생산직뿐 아니라 사무직·소프트웨어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키로 했다. 지난해에도 삼성은 고졸을 8000명이나 채용했지만 대부분이 학교 추천을 통해 생산 제조직 위주로 선발했었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12월 고졸 사무기술직 공채를 통해 110명을 채용하면서 '학력 파괴 채용'이라는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 회사는 공채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당초 계획보다 10% 많은 110명을 최종 선발해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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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뉴시스)
이밖에 LG그룹은 지난해 기능직 채용인원인 8400명의 절반 이상을 고졸로 채용했고 현대차그룹도 지난해 하반기 전체 신규 채용 대비 고졸 비율을 전년도 0.3%에서 21.4%로 대폭 상향 조정했다. 또 SK그룹은 지난해 전체 채용 인원의 20%인 1000명을 고졸자로 선발했고 롯데그룹과 CJ그룹 역시 지난해 하반기, 각각 3000여명과 2000여명에 달하는 고졸 사원을 채용해 ‘고졸 채용열기’에 동참했다.
◆고졸 채용 위해 평가 ‘넓히고’ 차별 ‘없애고’
같은 ‘고졸 열풍’의 시기이기는 해도 IMF 이전에 비해 2011년부터 불기 시작한 ‘신(新) 고졸시대’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고졸 신규 인력들을 채용하기 위해 기업들이 다양한 평가 프로세스를 내세우거나 새로운 인사제도를 통해 연봉과 승진에서 차별을 없애는 등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은 최근 110명의 고졸 인력을 공개 채용하면서 자체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설계 전문 엔지니어, 프로젝트 관리 등 중공업 분야의 전문가로 육성할 세부 프로그램을 미리 짜놨다. 현대중공업도 전국기능경기대회 입상자나 기술 우수학생 등 고졸자를 정규직으로 특채, 출신학교에 기능 장려금을 지원하는 ‘기능장려지원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최고의 고졸 채용인원을 자랑하는 삼성도 기존 학교장 추천 위주로 선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올해부터는 공채 방식을 병행키로 했다. 여기에 사무직 고졸공채를 신설해 500명을 뽑고 200명은 마이스터고 재학생으로, 또 기타 수시채용으로도 300명을 선발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처럼 기업들의 전문화된 채용 평가가 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인사제도를 통해 연봉과 승진에서 차별을 없애는 등 처우개선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도 ‘2011년발(發) 기업들의 고졸채용 붐’에서 엿보이는 또다른 특징이다.
두산그룹은 최근 생산직 직원도 임원까지 승진할 수 있는 새 인사제도를 마련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통상 제조업계 전반적으로 고졸과 전문대졸 출신의 생산직 사원이 부장급까지만 승진이 가능했던 게 현실을 과감히 깬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대우조선해양 역시 지난해부터 고졸자 공채를 진행해 4년간 사내 양성교육을 실시한 뒤, 대졸 사원들과 똑같이 대우하는 새로운 인사제도를 도입했다. CJ그룹의 고졸출신들도 올해부터 회사별 사내 기술훈련 과정과 업종별 특화교육 등을 거쳐 성과가 인정되면 입사 후 6년이 지나야 대졸 신입사원과 같은 직급으로 승격할 수 있었던 일반직의 승격 기간을 5년으로 단축시킬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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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고졸은 대졸은 여전히 ‘넘사벽’?
그렇다면 이같은 최근 고졸 채용의 붐에 대해 재계 전문가들은 어떤 시각으로 해석할까.
일단 고졸 채용 열기가 뜨거운 것에 대해선 경기부양 등의 외형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정부의 ‘학력 인플레이션, 고졸 실업 해소’ 정책 방향에 코드를 맞춘 기업과 공공기관의 행보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김현철 한국경영정보연구원장은 “지난해말이나 올초 고졸 채용에 힘을 쏟고 있는 주요 기업들의 행동 이면에는 정부의 ‘성장동력 확충’ 등의 정책에 부응하기 위한 액션이 숨겨져 있다"고 해석했다.
한편에선 대기업과 금융권을 중심으로 고졸채용 바람이 불고 있지만 여전히 대졸 직원들에 비하면 ‘좁은 취업문’으로 들어가야 하며, 입사 후에도 대졸직원과의 차별이 여전하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고졸자와 대졸자 간 첫 연봉 격차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난 2002년 당시 고졸자의 첫 연봉은 평균 1220만원, 대졸자는 평균 1652만원으로 1.35배 차이를 보였지만 지난 2009년에는 각각 평균 1648만원, 2436만 원으로 1.48배 차이로 오히려 늘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고졸자 차별해소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취업사이트 A사 관계자는 “직무급제를 비롯해 고졸 쿼터제처럼 고졸인력의 사회진출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정부도 고졸채용을 장려하는 데만 머무르지 말고 정부부터 7급, 9급 공무원 채용을 고졸자 중심으로 개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밖에 고졸채용이 늘고 있지만 ‘유리천장'을 없애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시각도 적지않다.
B고교 취업담당자는 "대졸자 중심의 대기업 조직에서 고졸자들과 대졸자들이 똑같은 구성원으로 대우받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라며 "동등한 대우라고 공공연히 알려도 실제 기업 내부에선 엄연히 보이지 않는 차별인 ‘유리천장'이 존재한다"고 강조했다.
동구마케팅고 정운계 교감
"제1 금융권 취업문 열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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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졸 취업시장 트렌드는.
▶ 제1금융권의 진출이 부쩍 많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은행권의 취업문이 10년만에 열린 셈이다. IMF이후 10년 동안 사실상 금융권에서는 고졸출신 신입사원을 거의 안 뽑았다.
-금융권 취업문이 왜 열렸다고 보나.
▶ 아무래도 정부차원에서 금융기관이나 관련 기업들에 세재 혜택을 주고 동반성장 등을 독려한 게 작용한 것 같다. 그리고 고졸사원들의 경쟁력이 예전보다 더 높아진 점도 관여했을 것으로 해석된다.
-대졸에 비해 고졸인재들의 경쟁력은.
▶ 실무능력이 (대졸 출신들에 비해) 더 낫다고 자부한다. 우리 학교만 해도 1학년때부터 기본적인 회계스킬이나 컴퓨터 활용능력 등을 배운다. 졸업할 때가 되면 이미 체계적으로 실무능력을 습득하는 것은 물론 자격증까지 취득한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최근 학생들이 선호하는 취업분야는.
▶ 금융권의 문이 열려서 그런지 은행, 보험 회사 등을 선호한다. 여기에 병원이나 공제조합 등 비교적 안정적인 업종이나 직군을 찾기도 한다. 반면 금융이나 무역, 식품, IT 등의 업종은 덜 선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