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조건을 신중히 검토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존 참여국과 예비양자협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1월29일 여의도 수출입은행에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전격적으로 TPP 참여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밝혔다. TPP 가입을 확정한 것은 아니라고 애써 해명했지만 사실상 참여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TPP 협상을 주도하는 미국의 적극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없다며 외면하던 입장에서 180도 선회한 것이다.
TPP 대세론에 힘이 실리자 미국은 마이클 프로먼 무역대표부(USTR) 대표 명의로 환영성명을 발표하며 발 빠르게 화답했다. 하지만 중국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겉으로는 예상했던 일이라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중국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던 한국의 이탈은 커다란 타격일 수밖에 없다.
TPP가 중국을 고립시키려는 미국 주도의 경제협력체라고 비난했던 당초 입장을 바꿔 진지하게 가입 여부를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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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P, 어떤 협정이기에
TPP(Trans-Pacific Partnership)는 2015년까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관세철폐 및 경제통합을 목표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이다. 상품거래는 물론 원산지 규정, 무역구제조치, 위생검역, 기술장벽, 지적재산권, 정부조달, 경제정책 등 자유무역협정의 거의 모든 사안이 포함된다.
TPP는 2005년에 뉴질랜드와 싱가포르, 칠레, 브루나이 등 4개국이 공동으로 출범한 환태평양 전략적 경제동반자협력체제로 시작됐는데, 2008년 미국이 가입 의사를 선언하면서 판이 커졌다. 이후 호주, 베트남, 페루, 말레이시아, 캐나다, 멕시코가 참여했고 일본이 치열한 국내논쟁 끝에 지난 7월 참여하면서 12개국으로 늘어났다.
TPP는 가입국간 모든 무역장벽 철폐, 즉 관세 100% 철폐를 목표로 한다. 12개 회원국의 인구가 7억9200만명에 달하고, 국내총생산(GDP) 총액이 27조5000억달러로 세계 GDP의 38%를 차지해 협정이 체결될 경우 메카톤급 경제권이 형성된다.
◆중국, 왜 TPP 가입을 주저하나
중국은 TPP 가입에 신중한 입장이다. 이 협정이 환태평양 국가들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사실상 중국을 포위하려는 미국의 전략으로 보고 있어서다. 실제로 TPP에 대한 미국의 열정은 대단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집권 2기 경제정책의 최우선순위를 TPP 타결로 정하고 공을 들이고 있다.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TPP 협상 타결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중국은 '완전개방'을 추구하며 빠른 속도로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TPP가 자국 경제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쌀을 비롯한 농산품과 정부조달시장 개방, 지적재산권 보호, 노동·환경 등의 분야에서 선진국과 현격한 격차가 있는 만큼 시장개방에 부담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TPP 가입 대신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체결에 집중하고 있다. RCEP(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는 한·중·일 3개국과 아세안 10개국, 호주, 뉴질랜드, 인도가 참여하고 있다. RCEP는 낮은 단계의 무역자유화부터 차근차근 시작해가는 '경제협력'을 지향하는 만큼 TPP보다 부담이 덜하다. 게다가 중국의 입김이 강하게 미치는 아세안이 주축인 만큼 위안화 국제화 등을 통해 아시아의 경제패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TPP를 강 건너 불처럼 관망하던 중국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협상이 예상외로 급진전되고 있어서다. 11월25일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모인 12개국 TPP 협상 대표들은 상당수 핵심현안에 대한 합의를 끌어냈다. 외신은 연내 타결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12개 나라의 입장이 각자 다른 만큼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판단하던 중국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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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P 가입 득실 따져보는 중국
TPP가 타결될 경우 중국은 다방면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성장잠재력이 풍부한 아시아·태평양의 경제일체화가 진행되는데 여기서 낙오할 경우 중국의 영향력 축소가 불가피하다.
향후 타 지역과의 무역협상에서도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를 놓고 충돌하고 있는 영원한 숙적 일본이 미국과 함께 TPP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TPP 참여 선언은 결정타가 됐다. 한국은 중국과의 FTA 체결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TPP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2단계 FTA 협상을 진행 중인 두 나라는 9월에 마무리한 1단계 협상에서 품목수 기준 90%, 수입액 기준 85%의 자유화율(관세철폐율)에 잠정합의하는 등 순조롭게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중국은 한국의 입장선회가 양국간 FTA 협상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100% 관세철폐를 목표로 하는 TPP가 실현되면 개별 국가간 FTA가 무력화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TPP에 참여할 경우 양국간 별도의 FTA가 갖는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것. 이와 관련 현 부총리는 "TPP를 배타시하던 중국의 태도가 완화됐다"며 한국의 입장변화에 중국이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중국은 최근 TPP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장연생(張燕生)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대외연구소장은 "만사는 화와 복이 함께 한다"는 중국철학관을 인용하며 중국의 TPP 가입에 대한 낙관론을 제시했다. 중국경제를 총괄하는 리커창(李克强) 총리도 "RCEP 회원국 대부분이 TPP 협상에도 참가하고 있는 만큼 두 경제협력체가 세계무역의 양대 톱니바퀴 역할을 하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한국의 갑작스런 TPP 선회와 관련, 중국과의 FTA만 신경 쓰다가 때를 놓쳤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협상이 마무리단계에 있어 TPP에 참여하려면 12개국의 협정 성립을 기다린 뒤 기존 참가국의 승인을 일일이 받아야 한다. 특히 후발 참가국들은 기존 TPP협정을 그대로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 한국에 불리한 조항이 상당수 포함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험난한 협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0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