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찾은 경의선 신촌역 토끼굴.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명물거리삼거리 토끼굴 입구에 백범 김구 선생이 그라피티로 환생했다. 백범을 비롯한 근현대사 인물 등을 표현한 그라피티가 이 토끼굴의 자랑거리다. /사진=박정웅 기자
지난 8일 찾은 경의선 신촌역 토끼굴.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명물거리삼거리 토끼굴 입구에 백범 김구 선생이 그라피티로 환생했다. 백범을 비롯한 근현대사 인물 등을 표현한 그라피티가 이 토끼굴의 자랑거리다. /사진=박정웅 기자

사람 맛에 찾아나선 경의선 토끼굴
근현대사 질곡이 길거리그림으로 태어나 시대상 반추

토끼굴엔 판타지가 없다. 수상한 시절, 갖은 풍파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삶의 흔적이 더덕더덕 붙었다. 토끼굴 안팎은 엄연한 현실이 부릅떴고 ‘흰 토끼’는 애초에 없었다.
비좁은 지하통로인 토끼굴은 기찻길 아래를 가른다. 쓰임새 측면에서 기찻길 토끼굴은 굴다리의 한 종류다. 다만 다리(교각)가 없고 자동차 대신 사람만 다닌다는 점에서 굴다리와는 차이가 있다. 어쨌든 기찻길 아래를 왕래하는 통로라는 의미는 같겠다.

속도와 첨단의 시대, 웬 사람만 오가는 기찻길 토끼굴 타령인가. 신작로의 추억처럼 근대의 상징인 기차가 빚어낸 삶의 풍광이 흑백영화마냥 아련해서다. 또 보행전용 토끼굴은 개발의 여파로 사라지거나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것이 많아서다. 


경의선 수색역 토끼굴을 걷는 시민들. 수색역 토끼굴은 '사계'를 테마로 한 벽화가 단촐하게 그려져 있다. 벽화 아래, 마르지 않는 자연수는 그 소리가 경쾌하다. /사진=박정웅 기자
경의선 수색역 토끼굴을 걷는 시민들. 수색역 토끼굴은 '사계'를 테마로 한 벽화가 단촐하게 그려져 있다. 벽화 아래, 마르지 않는 자연수는 그 소리가 경쾌하다. /사진=박정웅 기자
선로가 갈라놓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토끼굴엔 기차와 사람이 빚어내는 빛바랜 그림이 어렴풋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판타지가 아니라도 괜찮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거나 ‘가랑이 사이를 기었다’는 탄생과 통행세 비화 같은 것들이 문득 스치는, 도심서 몇 남지 않은 토끼굴 여행은 마냥 좋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애환도 이젠 동요처럼 가벼운 시대. 요샛말로 그것을 다크투어라 읽을지라도 어두침침했던 외길을 찾는 여행은 기껍다. 경의선 신촌역과 수색역 언저리. 근현대사의 질곡은 간결한 인물 그라피티(길거리그림)로 바뀌어 시대를 관통한다. 또 토끼굴과 사람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낸 삶의 흔적도 긴 터널에 묻혀있다.


◆근현대사 인물 만나는 신촌역 토끼굴

신촌역 토끼굴을 지나는 시민들. 근현대사 인물을 비롯해 인상적인 그라피티 작품이 눈길을 끈다. /사진=박정웅 기자
신촌역 토끼굴을 지나는 시민들. 근현대사 인물을 비롯해 인상적인 그라피티 작품이 눈길을 끈다. /사진=박정웅 기자
신촌역 토끼굴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명물거리삼거리와 세브란스병원 방향을 잇는다. 길이 65m의 터널은 경의선의 역사처럼 근현대사 100여년을 담았다. 둥근 아치형의 터널 벽엔 지난달 새 단장한 그라피티가 눈길을 끈다. 서대문구가 공공미술 취지로 조성한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 유관순 열사, 윤동주 시인, 도산 안창호 선생 등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6월항쟁의 상징인 박종철·이한열 열사를 만날 수 있다. 유관순 열사와 윤동주 시인, 그리고 이한열 열사의 모교는 이곳 신촌이다.

신촌역 토끼굴에 그려진 유관순 열사와 윤동주 시인 그라피티. /사진=박정웅 기자
신촌역 토끼굴에 그려진 유관순 열사와 윤동주 시인 그라피티. /사진=박정웅 기자
젊은층이 많은 대학가에 자리한 까닭에 토끼굴은 2000년대 초반 국내 그라피티 문화가 싹튼 장이었다. 새 단장한 벽면엔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과 더불어 키치적 감성이 돋보이는 창작품도 눈길을 끈다. 또 한 자리를 차지한 평창올림픽 마스코트 수호랑도 살가워 아이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춘다.
명물거리삼거리 토끼굴 초입의 창천가압장도 눈여겨볼 만하다. 안산, 홍제천, 독립문 등 서대문구의 자연과 역사를 담은 스토리 벽화가 사방을 감쌌다. 알고 보면 가압장 시설은 예술작품에 자리를 내준 캔버스다.


6월항쟁의 상징인 박종철, 이한열 열사도 토끼굴을 장식했다. /사진=박정웅 기자
6월항쟁의 상징인 박종철, 이한열 열사도 토끼굴을 장식했다. /사진=박정웅 기자
6월항쟁을 비롯해 민주화운동의 한 공간인 신촌. 전투경찰과 소위 백골단의 ‘토끼몰이’에 쫓기거나 몸을 숨겼을 토끼굴은 지난해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그라피티 작품과 드라마 촬영지라는 유명세 덕에 지역 여행명소로는 손색이 없지만 일부러 찾는 이는 드물다.
◆삶의 불씨 꺼지지 않는 수색역 토끼굴

수색역사 통로에서 바라본 경의선 풍경. 선로 왼쪽은 디지털미디어 거점도시로 환골탈태한 마포구 상암동이고 오른쪽은 최근 재개발이 한창인 은평구 수색동이다. /사진=박정웅 기자
수색역사 통로에서 바라본 경의선 풍경. 선로 왼쪽은 디지털미디어 거점도시로 환골탈태한 마포구 상암동이고 오른쪽은 최근 재개발이 한창인 은평구 수색동이다. /사진=박정웅 기자
수색역 토끼굴은 삶의 공간이다. 은평구 수색동(수색치안센터)과 마포구 상암동(상암미디어센터 방향)을 잇는 통로로 그 길이가 무려 240여m에 이른다. 젊음의 공간인 신촌의 것이 아치형인 반면 이곳은 사각형이다.
벽화도 다르다. 그라피티로 치장한 신촌은 역동적이다. 이에 비해 수색은 사계를 이야기하는데 다소 정적이다. 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토끼굴 전체 배수로를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경쾌하다. 이따금 굴 안팎의 온도차 때문에 옅은 안개도 낀다.

수색역 수색치안센터 인근의 토끼굴. 긴 지하통로를 지나면 상암동이다. /사진=박정웅 기자
수색역 수색치안센터 인근의 토끼굴. 긴 지하통로를 지나면 상암동이다. /사진=박정웅 기자
20개 이상의 선로와 수색차량기지를 머리에 인 수색역 토끼굴. 굴 안팎의 벽화와 옛 사진이 암시하듯 이곳은 경의선을 넘나드는 생활 통로였다. 한때는 쓰레기 매립장인 난지도와 생활공간인 수색동을 잇는 넝마주이의 길이었다. 앞서 한국전쟁 중에는 역설적이게도 피난과 도륙의 공간이었다.
수색동과 상암동은 오래 전에는 한 몸이었다. 난지도는 여의도처럼 한강의 하중도였다. 한강물이 샛강에 차오른다는 ‘물치’와 같은 옛 지명이 전해온다. ‘물빛’을 뜻하는 수색의 지명도 한강물을 떠올리게 한다. 이후 개발과 매립, 경의선 철길 단절 등을 이유로 1975년 2개의 행정동으로 분리됐다.

두 동네의 명암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엇갈린다. 특히 상암지역은 상전벽해를 맞았다. 굵직한 자연공원이 여럿 조성된 난지도는 서울지역 관광명소가 됐다. 상암동은 디지털미디어 거점지역으로 환골탈태했다.

토끼굴을 나선 상암지역엔 디지털미디어 기업들이 들어섰다. /사진=박정웅 기자
토끼굴을 나선 상암지역엔 디지털미디어 기업들이 들어섰다. /사진=박정웅 기자
반면 경의선 너머 수색동은 낙후 일로를 걸었다. 최근 우여곡절 끝에 재개발이 한창이다. 몇년 전 수색동과 토끼굴을 배경으로 한 영화 <춘몽>과 <수색역>의 뒷맛은 텁텁해 마치 무성영화를 방불케 했다. 
수색의 하늘은 잿빛이어도 삶은 활기차다. 빈 집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청소차마저 외면하는 골목, 아버지의 복수마냥 쓰레기 더미는 부풀어도 떠나지 못한 아이들은 왁자지껄 동네를 들쑤신다. 토끼굴 인근의 오래된 대장간은 불씨를 꺼뜨리는 법이 없다.

옛 상암지역을 연상케 하는 벽화. 샛강을 낀 난지도는 오래 전에는 하중도였다. /사진=박정웅 기자
옛 상암지역을 연상케 하는 벽화. 샛강을 낀 난지도는 오래 전에는 하중도였다. /사진=박정웅 기자
옛 이야기가 아쉽다면 토끼굴 입구 간이매점에서 목을 축여도 좋다. 물음에 손사래 치는 주인장을 성가시게 할 이유는 없다. 좁다란 의자에 걸터앉아 드나드는 발걸음만 봐도 토끼굴 시간여행은 훌쩍 지나간다.
수색의 개발은 새롭게 들어서는 아파트만이 아니다. ‘2030 서울생활권계획’에 따르면 장장 240여m의 토끼굴도 그 모습이 바뀔 모양이다. 철길로 단절된 은평구와 마포구를 빠르고 넓게 연결할 지하차로 계획이 있어서다.

서울 도심, 경의선 철길여행은 신촌과 수색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 두 토끼굴의 중간쯤인 가좌역서 내려 홍제천을 건너면 또 다른 토끼굴이다. 지하통로를 나서면 경의선숲길이다.

도시재생 프로젝트 차원에서 옛 경의선(용산선) 폐철길을 공원으로 조성했다. 연남동(마포구)-효창동(용산구) 6.3㎞ 구간이다. 젊음의 거리인 연트럴파크와 역사의 공간인 효창공원을 걸어도 좋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36호(2018년 4월18~24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