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조민진 작가
/사진=조민진 작가

단단하고 반듯한 직육면체 박스 위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렇게 심하게 흔들릴 줄은 시도해보기 전까진 미처 몰랐다. 일단 튼튼한 박스 위에 올라선다. 이건 하나도 안 어렵다. 차려 자세에서 양손을 골반 위에 얹는다. 역시 안 어렵다. 한쪽 무릎을 살짝 구부리면서 반대쪽 다리를 뒤로 쭉 뻗는 동시에 상체를 사선 방향 앞으로 기울인다. 뭐, 이 또한 별로 어렵지 않다. 이 정도 균형쯤이야.

이번엔 자신만만하게 뜨고 있던 눈을 감아본다. 헉…… 이게 웬일? 몸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한 다리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튼튼한 박스가 갑자기 일그러진 것도 아닌데 눈을 감는 것만으로 나는 균형을 잃고 흔들리고 있다. "다리가 심하게 떨릴 수도 있을 거예요. 우리는 눈에 의지를 많이 하고 있기 때문에……자, 중심 잡으세요. 할 수 있어요!" 필라테스 수업 시간에 이뤄지는 밸런스 훈련. 한껏 목청을 돋우며 "할 수 있다"고 독려하는 강사의 말을 믿고 싶었지만 이러다 갑자기 박스 아래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아서 실눈을 떴다 감기를 반복하며 간신히 자세를 유지했다.


보지 못하면 쉽게 균형을 잃는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다. 뇌가 판단해 균형을 잡는 데는 시각 정보가 중요하다. 물론 '눈 감고 한 다리로 균형 잡기'도 지속적으로 연습하면 한층 익숙해지는 문제긴 하다. (혹시 따라 해보고 싶다면 일단 바닥에서 해보길 권한다. 굳이 의자나 박스 위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눈을 뜨거나 감을 때의 차이를 분명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저 바라봄으로써 불안정한 자세로도 오래 서 있을 수 있음을 새삼스레 깨닫자 눈이 하는 많은 일들이 다시금 경이롭게 느껴졌다.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는 영화 속 대사를 알게 됐던 소녀 시절, 눈으로 말도 할 수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실감했을 때처럼 말이다. 이 시적인 표현은 흑백 영화 '카사블랑카'(1942년)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잉그리드 버그만을 지그시 바라보며 내뱉는 대사가 우리말로 멋들어지게 의역된 것이었다. 실제 원어는 "Here's looking at you, kid". 지켜주고 싶은 연인을 향한 달콤하고 애틋한 속삭임, "내가 이렇게 당신을 바라보고 있잖아"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험프리 보가트는 입으로 대사를 했고 눈으로 사랑을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눈이 말도 한다.

눈에 의지해 스스로를 돕고 눈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아마도 우리에게 무의식적 일상일 것이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염두에 두면 좋은 사실도 있다. "눈 맞춤은 집중을 나타낸다"는 것. 10년 넘게 오래 갖고 있는 책 '눈 맞춤의 힘'(마이클 엘스버그 지음)에서 읽었던 내용이 틈틈이 나를 일깨웠다. 함께 있는 사람에게 존중과 관심을 표하기 위해선 꼭 그의 눈을 바라봐줘야 한다. '내가 이렇게 당신 얘기를 듣고 있다'는 뜻을 전하는 방법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