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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
"돈이 손에서 손으로 옮겨가는 걸 봐야 마음이 편해."
(서울=뉴스1) 김예원 기자 =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유 모 씨(75)는 2~3일에 한 번꼴로 은행을 찾는다. 현금자동입출금기(ATM기)에 가서 카드를 넣고 5만원, 10만원씩 현금을 인출한다. 현금은 근처 시장에서 과일을 사거나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을 때 쓴다. 가게에서 카드를 받긴 하지만, 현금을 꺼내 값을 치르는 방식이 훨씬 익숙해서다.
돈을 부칠 일이 있을 때도 ATM기를 쓴다. 유 씨가 디지털 뱅킹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그의 지갑엔 카드도, 휴대전화 온라인 뱅킹 애플리케이션(앱)도 있다. 하지만 거의 쓰지 않는다. 은행원에게 물어 휴대전화로 돈을 넣고 빼는 방법을 배운 적도 있지만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난다.
터치 한 번에 휙휙 바뀌는 화면을 보고 있자면 돈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하기 때문이다. "잘못 눌렀다가 돈이 이상한 곳에 나가면 어떡해? 무서워서 못 해." 유 씨의 두툼한 검지는 ATM기 화면 '출금' 버튼보단 작지만 모바일 뱅킹 앱 '이체' 버튼보단 컸다.
디지털 금융 및 온라인 뱅킹이 보편화되며 한국도 '현금 없는 사회'에 한발짝 더 다가서고 있지만 금융소외 계층이 느끼는 비대면 거래에 대한 불안감과 낯섦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 금융 소외 계층 중 하나인 고령층은 비대면 거래에 대한 불신이 있고, 디지털 기기 사용에 익숙지 않음에도 이들의 적응을 도와 줄 대책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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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서울 마포구의 한 은행이 특정 일자에만 동전 교환이 가능하다는 안내문을 써 붙였다. 2025.01.17 ⓒ 뉴스1 김예원 기자 |
금융 앱, 터치 한 번에 화면 '휙'…보이지 않는 결제에 대한 두려움
온라인 뱅킹이나 모바일 거래에 막연한 두려움이나 불편함을 갖는 건 유 씨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19일 <뉴스1>이 도심 은행 ATM기 앞에서 만난 60~80대 노인 10명들은 현금 거래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디지털 거래를 믿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은행이 연 지 한 시간도 채 안 된 시각인 오전 9시 30분. 70대 남성 A 씨가 마스크와 귀마개, 목도리로 중무장하고 서울 영등포구의 한 은행을 방문했다. 느린 걸음으로 ATM기 앞에 선 A 씨는 10여 분간 천천히 기기 화면을 툭툭 두드렸다. 업무를 마친 뒤엔 파쇄기 대신 직접 손으로 영수증을 갈기갈기 찢어 주머니에 넣었다.
A 씨는 공과금 온라인 이체 방법을 알긴 하지만 잘못 버튼을 누를까 겁이 나 항상 은행을 들른다고 말했다. A 씨는 "계좌 이체가 다른 곳으로 들어가서 돈을 잃어버리거나 누가 내 개인 정보를 도용하면 어떡하냐"며 "젊은 사람들이 보기엔 번거롭겠지만, 휴대전화로 돈을 부치고 걱정하는 게 우린 더 불편하다"고 덧붙였다.
한국 사회에선 이미 보편화된 카드 결제도 일부 노인들은 불안하다고 답했다. ATM기에서 1만원을 뽑고 여러 차례 접어 지갑에 넣던 80대 김 모 씨는 "음식 먹고 계산할 때 카드를 줬더니 실제 값보다 더 결제했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는다"며 "우린 잘못 지불해도 통장을 직접 보기 전까진 몰라서 처음부터 현금으로 정확히 치르는 게 낫다"고 했다.
주로 이용하는 가게들이 전통시장이나 포장마차라 카드 결제가 어렵다는 답도 여럿 나왔다. ATM기에서 만 원권 3장을 인출했다고 밝힌 60대 김 모 씨는 "역 내 1000~2000원 하는 빵을 자주 사 먹는데, 가격이 싸서 그런지 현금만 받는다"고 했다.
유 씨도 "집 근처 시장을 자주 이용하는데 거기 가판대는 카드 주면 안 받는다. 노인들이 자주 가는 이발소도 마찬가지"라며 "체크 카드랑 별개로 현금은 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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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오후 서울 시내에 설치된 시중은행 ATM 기기 모습. 2024.11.13/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
지방 살면 현금 사용 '이중고'…'고령자 모드' 출시됐지만 효용성 ↓
그나마 이들처럼 도심에 거주하는 고령층이면 상황이 나은 편이다. 현금 사용을 위해선 필수적인 ATM기가 곳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뉴스1>이 만난 노인들 중 1명을 제외하곤 모두 거래 은행 ATM기가 제일 가깝게는 도보 10분, 멀게는 버스로 30분 내외에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지방에 사는 노인들은 현금을 찾을 때마다 이중고를 겪어야 한다. 2021년 한국은행이 집계한 '광역시·도별 ATM 설치 현황'에 따르면 서울엔 ATM기가 단위 면적당 33.9대꼴로 있었지만, 강원도의 경우 같은 단위 면적당 ATM기가 0.3대로 100배가 넘는 격차를 보였다.
전국 ATM기가 5년 전 대비 3분의 2 수준으로 줄어든 것을 감안하면 이런 격차는 더욱 심화할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지난해 6월 대구 달서구 대곡동의 DGB대구은행 ATM기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동네 주민들이 기기를 없애지 말아 달라고 손 글씨로 호소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지방 소외' 논란에 4대 은행은 제휴를 맺고 전통시장 근처 등 지역에 공동 ATM기를 설치하기도 했지만, 강원 삼척 등 설치된 곳은 아직 전국 3곳 정도에 불과해 실효성을 거두진 못하고 있다.
고령자를 위한 금융 앱과 모바일 금융 서비스도 출시됐지만 디지털 기기 자체를 낯설어하는 노인들의 진입 장벽을 낮추기엔 아직까지 역부족이다.
2024년 9월 발간된 자본시장연구원의 '디지털 금융 소외 현상에 대한 글로벌 움직임과 시사점'에 따르면, 금융 앱들의 고령자 모드는 일반 모드와 큰 차이가 없고, 앱 속 서비스명이나 화면 구성이 기업별로 달라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들이 사용하기엔 불편함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한국산업정보학회 저널에 발표된 '고령층 연령에 따른 금융 앱 사용성 인식에 대한 차이' 연구에 따르면, 75세 이상 노인들은 금융 앱 사용 시 업데이트 등이 이뤄지면 바뀐 부분에 대해 기억을 잘하지 못하거나 관련 내용을 인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노인들이 스마트기기를 배우고 사용할 기회를 제공해 비대면 거래에 대한 경각심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는 "노인들이 비대면 디지털 거래를 꺼리는 이유는 익숙지 않은 체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인 경우가 많다"며 "기초연금이나 경로 카드 등 노인들에게 익숙한 제도부터 디지털 전환을 시도해 비현금 사회로의 자연스러운 유입을 유도할 방안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