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제 셰프.

(서울=뉴스1) 전호제 셰프 = 며칠 전, 함께 일하는 베트남 직원들이 만들어준 어묵 국수를 맛본 적이 있다. 다양한 현지 어묵에 미나리를 넣어 뜨겁게 먹는 국수였다. 이 음식에는 생파인애플이 들어 있었는데 뜨거운 국물에 새콤한 파인애플은 꽤 이색적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이 음식을 더운 여름날 기운이 나게 하는 보양식처럼 먹는다고 했다. 파인애플을 이렇게도 먹을 수 있다는 걸 처음 느낄 수 있었다. 40도가 넘는다는 현지 날씨를 상상해 보면 꽤 그럴듯한 조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올해 들어 파인애플 수입량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국내 과일 가격이 오르면서 사과의 대체 과일로 소비가 늘었기 때문이다. 이제 옛날처럼 통조림 파인애플을 먹던 시대는 지났지만, 먹는 방식은 아직 다양하지 않다. 볶음밥, 피자, 탕수육 정도를 빼면 파인애플은 양념으로 사용되는 정도다.

하지만 단순히 수입 과일로만 치부하기엔 파인애플은 쓰임이 많은 과일이다. 우리가 그냥 버리는 잎에는 염증 완화에 효과적인 브로멜린이라는 성분이 풍부하다. 또 과육에는 강력한 단백질 분해효소가 포함돼 있어 고기를 양념에 재울 때 갈아 넣기도 한다.

예전에 처음 호텔에서 인턴으로 일하던 시절, 파인애플잎을 아이스크림 장식으로 쓰기도 했다. 요즘은 더 나은 허브 장식이 많지만, 20년 전에는 파랗고 이국적인 잎이 신선하게 느껴졌었나 보다.


질긴 파인애플잎의 색다른 쓰임새

파인애플잎은 유독 질기고 뻣뻣하다. 이런 이유로 종량제 봉투를 뚫고 나오기도 하며 잘 썩지 않아 처리가 곤란하다. 하지만 이 질긴 잎은 의외의 쓰임새가 있다.

필리핀 원주민 전통 원단인 '피나'는 파인애플잎의 섬유로 만든다. 여기에서 착안해 파인애플 농가에서는 잎을 수거해 잘 말려 스페인에서 특수가공을 거쳐 '피나텍스'라는 가죽 대체 소재로 개발하기도 했다. 조만간 우리가 사용하는 가죽 제품을 조금씩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인애플을 김치를 담글 때 넣기도 한다. 작고하신 요리연구가 임지호 선생님은 총각김치에 파인애플을 갈아 넣어 숙성시킨 적이 있다. 한 번 맛본 적이 있는데, 잘 익은 김치에 거부감 없이 녹아든 과일 향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파인애플의 연육 효소 덕분에 소화 기능을 돕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어 디저트로 활용하기에도 좋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 프렌치 레스토랑에서는 코스 요리 식후 무한 제공되는 디저트 카트를 손님 앞에 끌고 왔다. 이곳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바질 향이 나는 '포치'(Poach·약한 불에 천천히 익히는 요리법)한 파인애플이었다. 파인애플은 단맛이 강한 과육이라, 아니스(Anise) 계열의 상쾌한 바질 향이 더해져 맛이 좋았다. 차갑게 만들어 오래 두고 먹기에도 좋았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원래는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달라진다는 의미로 쓰이지만, 요즘처럼 이민이 흔해진 사회에서는 이주민들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 온 문화도 곧장 전파되는 시대가 되었다.

파인애플 국수처럼 엉뚱한 시도로 새로운 음식 문화를 만들어 볼 수도 있고, 또 원주민 전통 옷감에서 힌트를 얻은 가죽 대용품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인종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주민의 문화가 우리나라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오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