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제 셰프

(서울=뉴스1) 전호제 셰프 = 35도가 넘는 열기가 가게 안을 달군다. 잘 돌아가던 에어컨이 갑작스럽게 멈춰버리자, 손님들 사이를 오가던 직원들도 높아진 실내 온도에 힘든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의 열기가 밀려 들어와 실내 온도는 점점 올라갔다.

점심시간에 손님들은 덥다 춥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럴 때는 들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 시원한 자리 혹은 냉기가 덜한 자리로 안내해야 한다. 사람마다 '편안함'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점심 서비스가 끝나면 직원 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더위에 지친 날에 딱 맞게 베트남 출신 직원 쿠인이는 여주를 가져왔다. 작은 오이만 한 여주를 반으로 가르고 속을 긁어낸 뒤, 약간 도톰하게 썰어 얼음물에 담가둔다.

뜨겁게 달군 팬에 차돌박이를 볶다, 얼음물에서 꺼낸 여주를 넣고 센불에 빠르게 볶아낸다. 마지막에 조미료로 간을 해 여주 볶음을 만들었다. 식사 시간, 직원들 표정이 한결 밝아진다. 다만 여주 볶음이 입에 들어갈 때마다 움찔한다. 그러나 곧 미소가 나온다. 일단 여주를 씹으면, 쓴맛이 입안에 침을 돌게 하고 마치 기운이 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덥고 습한 베트남에서 사람들이 여주를 즐겨 먹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주의 쓴맛은 어린 시절 감기약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쓴 가루약을 먹고 사탕으로 달래듯, 기름진 차돌박이가 여주의 쓴맛을 부드럽게 감싸준다. 스팸이나 달걀 볶음도 잘 어울린다.


볶아낸 여주의 식감도 재미있다. 생으로 먹으면 아삭한 여주는, 볶으면 '뽀도독' 하고 씹힌다. 기존에 먹어본 여느 채소와는 다른 독특한 식감에 놀라게 된다.

여주는 여름 제철 음식…당뇨에 좋아

우리가 먹은 여주는 베트남 종자를 한국에서 심은 것이다. 농촌 일을 많이 하는 베트남 이민자들은 고향에서 많은 작물을 가져와 기른다. 마치 미국에 건너간 한국인들이 배추나 열무를 기르듯이 말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기후가 점점 아열대화되면서 여주 같은 작물의 재배 면적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토종 여주가 있다. 베트남산이 길고 오이처럼 생긴 데 비해, 토종 여주는 작고 동그란 모양이다. 여주는 익으면 노랗게 변하고, 속에서는 빨간 과육에 쌓인 씨앗이 나온다. 이 과육은 향이 좋고 달콤하다. 노랗게 익어 갈라진 여주를 먹으면, 마치 과일처럼 단맛이 느껴진다.

어릴 적 집 창문 앞에는 작은 텃밭이 있었다. 그곳에 나팔꽃과 여주를 심었다. 땅에 줄을 박아 창문 쪽으로 올려주면 나팔꽃과 여주는 그 줄을 타고 쑥쑥 자랐다. 방에서 바깥을 보면 여주 열매가 장식처럼 매달려 있었고, 한여름 날씨가 한풀 꺾일 무렵이면 노란 열매가 터지곤 했다.

그 시절, TV에서는 재미난 외화 시리즈가 많았는데 특히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를 볼 때마다 노랗게 터지는 여주가 떠올랐다. 녹색 여주가 노랗게 변해 빨간 열매를 토해내는 모습은 헐크의 변신처럼 인상적이었다.

여주를 한자로 풀면 쓴 오이란 뜻의 '고과'(苦瓜)라고 하니 이름에 딱 맞는다. 오이를 먹다 꼭지 부분을 씹으면 꼭 여주 맛이 난다. 지금이 한창 여주가 나오는 계절이니 오이 대신 여주를 경험해도 괜찮을 듯하다. 여주는 당뇨에도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쓴맛이 싫은 사람들은 가루로 만들어 요구르트에 섞어 마셔도 좋다.

요즘처럼 두 겹의 이불을 덮은 듯한 폭염에 지친 분들이라면 든든한 보양식을 떠올릴 법하다. 올여름에는 여주의 매력으로 지친 입맛도 살리고 건강도 챙겨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