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이하 워라밸). 일과 생활의 균형을 뜻하는 이 단어는 2017년을 관통한 주요 키워드 중 하나다. 연봉과 복지를 중요시하던 직장인들이 워라밸 여부를 우선시하기 시작했고 기업은 우수인재 확보와 근무효율 향상을 위해 워라밸 문화 조성에 박차를 가하는 추세다. 정부도 적극적 지원정책을 펼치며 워라밸 문화 확산에 힘을 보태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이에게 워라밸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누구나 워라밸을 꿈꾸지만 현실은 꿈과 다르다.
◆이유 있는 ‘워라밸 열풍’
# “자율출퇴근제를 이용해 오전 9시30분에 아이를 사내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여유롭게 출근해요. 양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맞벌이부부라 주 40시간 근무시간에 맞춰 자유롭게 출퇴근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자율출퇴근제가 없었더라면 일과 가정 두마리 토끼를 잡기 어려웠을 거예요. 오늘은 날씨가 좋아 오후에 일찍 퇴근해 아이와 함께 서울 근교로 나들이를 가려고요. 급한 업무는 모바일 S-MOIN으로 밖에서도 처리가 가능해서 부담이 없어요.” (김다미 롯데첨단소재 대리)
김 대리처럼 일과 생활이 균형 잡힌 삶을 사는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 최근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미혼남녀들에게 ‘일과 일상, 일과 사랑’에 대해 물었다. 지난 12월5~13일 미혼남녀 322명(남 140명, 여 18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남녀의 응답은 엇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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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
남성과 여성의 ‘워라밸이 잘 이뤄지고 있다’는 응답은 각각 53.6%와 35.7%로 조사됐다. 전체적으로 워라밸을 지키지 못하는 이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 가운데 여성보다 남성의 워라밸 이행률이 17.9% 더 높았다.
기업 사정이나 근무환경상 워라밸을 지키기 어려운 이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다. 또 가사와 육아에 대한 부담을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지는 가부장적 관념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아직은 워라밸족 비율이 비워라밸족보다 낮지만 기업과 직장인의 워라밸 실천 비율은 나날이 높아지는 추세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17 일·가정 양립 지표’에 따르면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를 도입하는 기업의 비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기업의 출산휴가·육아휴직·유연근무제 도입률은 2015년 각각 80.3%, 58.2%, 22.0%에서 2017년 81.1%, 59.1%, 37.1%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 직장인의 일과 생활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일을 한 적이 있는 사람 중 ‘일이 우선이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비율은 53.7%에서 43.1%로 낮아졌고 ‘일과 가정생활을 비슷하게 생각한다’는 응답은 34.4%에서 42.9%로 증가했다. 특히 ‘가정생활이 우선이다’는 사람은 11.9%에서 13.9%로 2% 증가했다.
정부에서 지정하는 가족친화 인증을 받은 기업과 기관도 2015년 1363개에서 2017년 1828개로 34.1% 급증했다. 특히 대기업(285개)·공공기관(560개)보다 중소기업(983개)의 인증 비율이 더 높아 워라밸은 기업의 규모와 무관한 사회적 트렌드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분석된다.
여성가족부는 자녀출산 및 양육지원, 유연근무제도, 가족친화 직장문화 조성 등 가족친화제도를 모범적으로 운영하는 기업 및 공공기관에 매년 심사를 통해 인증을 부여한다. 이 인증을 받으면 중앙부처, 지방자치단체, 민간은행 등에서 신용평가 우대, 세무조사 유예, 금리인하 등 143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다양한 당근책으로 일과 생활의 양립제도 확산을 유도하는 것이다.
대기업 한 관계자는 “국내외서 기업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일·가정 양립 지원제도의 도입으로 소비자, 시민단체 등 외부고객의 기업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내부적으로는 생활의 안정으로 임직원의 근로 만족도를 높일 필요성이 커졌다”며 “중장기적 경영전략의 핵심 이슈로 일·가정의 양립제도 논의가 이뤄지고 있고 단계적으로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트렌드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는 최근 출간한 <트렌드 코리아 2018>에서 새해에 가장 주목할 키워드로 워라밸을 꼽았다. 저자로 참여한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1988~1994년 사이에 태어난 젊은 직장인을 대표적인 워라밸 세대로 지목하며 이들이 2018년 강력한 ‘인플루언서’(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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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
◆문화확산 관건은 ‘CEO 의지’
하지만 통계청에 따르면 일과 생활의 양립을 위한 핵심제도인 유연근로제도를 시행하는 기업은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유형별로 시간선택제, 시차출퇴근제, 탄력근무제 도입률은 각각 24.6%, 22.7%, 18.6%에 불과하다.
또 일·가정 양립을 위한 주요 제도인 출산휴가제, 배우자출산휴가제, 육아휴직제, 가족돌봄휴직제를 적용하지 않는 기업의 비율은 각각 19%, 39%, 42%, 74%에 달한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정부가 주도하는 일과 가정의 양립제도 확산이 민간기업 곳곳에 뿌리 내리려면 최고경영자(CEO)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며 “결정권자가 근로자 트렌드 변화의 흐름을 읽고 직원들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는 방식으로 워라밸 문화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20호(2017년 12월27일~2018년 1월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