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동대문 북쪽 왕산로(旺山路) 창신동 입구 성곽에 각자성석이 모여 있다. 왕산로는 동대문(흥인지문)에서 청량리역 교차로까지 이어지는 길이며 정부는 항일의병장 왕산 허위(旺山 許蔿)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도로명에 그의 이름을 썼다.


왕산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고종의 밀지를 받고 부대를 자진 해산했다. 그 후 관직을 맡아 성균관박사, 중추원의관 등을 거쳐 1904년 오늘날 대법원장서리에 해당하는 평리원서리재판장에 올랐다.

하지만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에 분개한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그해 8월에는 군대도 강제 해산되는 등 국권이 본격적으로 침탈당했다. 군대해산은 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됐다. 왕산은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전국의 48개 의병부대의 집결체인 13도 창의군(十三道 倡義軍)이 조직되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진동창의대장이 됐다.

1908년 1월 말 그는 300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 지금의 청량리 부근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본대가 도착하기 전 미리 대기 중이던 왜군의 공격을 받고 패퇴했다. 그 후에도 경기도 북부를 거점으로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였으나 1908년 6월 일본 군부가 그의 은신처를 탐지해 양평에서 체포됐다. 그해 10월21일 오전 10시 왕산은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서 처형됐다. 그는 그곳에서 처형된 첫번째 사형수였다. 처형될 때도 의연하고 당당했으며 취조관들이 그런 모습에 감동해 그를 존대했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나 대부분 희생됐다.


국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을 기려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의 길을 ‘왕산로’로 이름 짓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호를 추서했다.


왕산로 입구의 각자성석. /사진=박찬규 기자
왕산로 입구의 각자성석. /사진=박찬규 기자

◆왕산로 입구의 각자성석
다시 각자성석으로 돌아가자. 정사각형의 반듯한 돌로 질서정연하게 쌓은 것으로 보아 이 구간은 숙종 때 축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오른쪽 맨 위에 ‘일패두’(一牌頭)라는 각자가 보인다. 패(牌)는 오군영의 상급부대 단위고 일패두는 그 부대의 부대장을 말한다. 그 옆의 ‘훈국’(訓局)은 훈련도감의 별칭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 태조와 세종 때는 군현으로 나눠 성을 쌓았으나 숙종 때는 오군영에서 축조했다. 따라서 이 구간은 오군영 중에서도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인들이 보수공사를 했다는 표지다. 훈국 옆 ‘책응 겸 독역장 십인’(策應兼督役將十人)의 각자가 보인다. 책응은 공사를 기획하는 일을 말하고 독역은 공사를 감독하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이 각자는 공사를 기획하고 감독했던 장수가 10명이란 뜻이다.

상단부에도 각자가 이어진다. 일패장(一牌將) 절충(折衝) 성세반(成世班), 이패장(二牌將) 절충(折衝) 김수선(金守善), 삼패장(三牌將) 사과(司果) 유제한(劉濟漢)이다. 일패장, 이패장, 삼패장은 각각 1패 2패 3패 부대의 우두머리를 말하고 절충과 사과는 무관의 직위로서 각각 정3품과 정6품 벼슬이다.

하단부 각자에는 석수(石手) 도변수(都邊手) 오유선(吳有善), 일패변수(一牌邊手) 양육오(梁六吳), 이패변수(二牌邊手) 황승선(黃承善), 변수(邊手) 김정립(金廷立)이다. 변수는 목수나 석수 등 기술자들의 우두머리를 말하고 도변수는 변수들의 우두머리다. 일패변수, 이패변수는 각각 일패 이패에 소속된 변수를 뜻한다.

끝으로 왼쪽 끝 위아래에 있는 강희(康熙) 사십오년(四十五年) 사월일(四月日) 개축(改築)이란 각자는 당시 조선이 떠받들던 청나라 연호인 강희 45년 4월에 개축했다는 의미다. 조선왕조의 집권연도로 환산하면 숙종 32년(1706)에 해당한다. 구체적인 일자가 빠진 것은 당시의 관행 때문이다.


동대문 성곽공원. /사진=박찬규 기자
동대문 성곽공원. /사진=박찬규 기자

◆동대문 성곽공원
이화마을의 암문으로 나오지 않고 성 안쪽 성곽길을 따라 내려오면 동대문성곽공원 뒤편으로 이어진다. 이곳엔 ‘서울 디자인 지원센터’가 성곽 언덕에 우뚝 서 있다. 이화여대 동대문병원이 목동으로 이전하면서 남겨진 옛 건물을 리모델링한 것.

이와 함께 동대문 쪽 성곽공원 언덕엔 120여년 역사의 동대문교회가 있었다. 이화여대 동대문병원의 전신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문을 연 부인병원인 ‘동대문부인진료소’(당시 이름은 동대문시약소)에서 1890년 10월21일 첫 정규집회를 열었고 그 이후 1892년 진료소 바로 옆에 예배실을 지었다.

2009년 8월 서울행정법원의 판결로 교회건물은 철거가 결정됐다. 사적 제10호인 서울성곽복원사업계획을 우선시한 것이다. 법원은 “서울성곽은 600년 이상 된 국가의 문화유산으로 큰 역사적 가치가 있는데 노후한 교회건물 및 주차장이 성곽의 일부를 점유한 데다 성곽을 가렸기에 경관을 회복하고 훼손된 성곽을 복원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판결 이유를 들었다. 결국 교회는 성곽복원을 위해 2014년 3월 철거됐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7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