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와의 의정 갈등을 겪으며 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의대생 이우석씨(가명·26세)는 투표를 해야 하는데 딱히 끌리는 선택지가 없다고 했다. 사진은 지난 4월29일 의대생 이우석씨(가명·26세)가 서울 소재 의대에 방문한 모습. /사진=김성아 기자

지난 4월29일, 서울의 한 의과대학 캠퍼스는 하루 종일 적막했다. 오후 2시 수업이 예정돼 있었지만 강의실을 찾은 학생은 두세명 뿐. 평소라면 북적였을 복도와 열람실은 텅 비었고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는 자율학습실에서도 학생들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2019년 의대에 입학한 이우석(가명·26세)씨는 지난해 2월, 윤석열 전 정부가 내놓은 '의료 개혁' 정책에 반대하며 강의실을 떠났다. 그는 "정부가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하자 동기와 선배들로부터 이 정책이 필수·지방 의료를 살리기보다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었고 결국 휴학을 결심하게 됐다"고 했다. 이씨는 "개인의 판단에 맡긴다고 했지만 사실상 '다 같이 동참해야 대의를 이룰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암묵적인 압박이 있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수업 거부 1년, 학교 가고 싶지만 못 간다… "하루 하루 조마조마"


2019년 의대에 입학한 이우석씨는 지난해 2월, 윤석열 전 정부의 '의료 개혁' 방안에 반대하며 강의실을 떠나게 됐는데 의정 갈등이 길어지자 걱정이 커진다고 토로했다. 사진은 지난 4월29일 찾은 서울 소재 한 의과대학 내부 모습으로 시끌벅적해야 할 복도와 열람실은 텅 비었다. /사진=김성아 기자

정형외과 의사를 꿈꿨던 그는 장기화하는 의정 갈등 속에서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털어놨다. 당초 올해 2월 졸업 예정이었지만 지난해부터 이어진 집단 수업 거부로 졸업 시점은 기약 없이 밀렸다. 최근엔 수업에 복귀하지 않아 유급 조처가 내려진다는 통보도 받았다. 이씨는 "전공의들까지 줄줄이 사표를 내는 상황에서 처음엔 사태가 길어야 한두달이면 끝날 줄 알았다"며 "여태껏 갈등이 수습되지 않고 어느덧 2025학년도 신입생까지 입학하게 돼 막막하다"고 토로했다.


등교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가족의 걱정도 커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거냐"는 부모님의 말씀에 마음이 무거워진 그는 매일 오후, 수학학원에서 중학생을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 이씨는 "하루하루가 조마조마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씨는 의료 집단 내의 '수업 거부' 강요가 심한 데다 복귀를 하면 '배신자' 낙인이 찍히기 때문에 수업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사진은 지난 4월29일 찾은 서울 소재 한 의과대학 자율학습실의 모습으로 시간이 지나도 학생들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진=김성아 기자

이씨는 학교를 가고 싶지만 갈 수가 없다고 했다. 여전히 의료 집단 내의 '수업 거부' 강요가 심한 데다 복귀를 하면 '배신자' 낙인이 찍히기 때문이다. "동맹휴학에 반대하거나 복귀하는 사람을 색출해 신상을 털고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유포한다"며 "수업 거부에 참여하면 같은 편, 참여하지 않으면 배신자라는 구도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이씨처럼 마음은 돌아가고 싶지만 수업에 복귀하지 못하는 의대생들은 적지 않다. 교육부가 지난 4월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국 24개 의과대학 재학생 7673명 중 87.9%가 '수업 복귀에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전국 40개 의대의 평균 수업 참여율은 25.9%에 그쳐 실제로 강의실에 모습을 드러낸 학생은 적었다.

'사회적 합의' 과정 무시한 윤 정부… "피해는 시민과 환자에게 돌아가"

정치엔 큰 관심이 없던 이씨는 지난해부터 이어진 의정 갈등을 겪으며 '정치가 내 삶에 이렇게 깊이 들어올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체감했다고 털어놨다. 사진은 지난 4월20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열린 의료정상화를 위한 전국의사궐기대회에서 의대생, 전공의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한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반발해 강의실을 떠난 지도 벌써 1년. 정치엔 큰 관심이 없던 그였지만 지난해부터 이어진 의정 갈등을 겪으며 부쩍 정치 뉴스를 찾아보는 일이 늘었다. 그는 처음으로 '정치가 내 삶에 이렇게 깊이 들어올 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체감했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제20대 대선 당시 윤 전 대통령을 지지했다고 한다. "호탕하고 정의로워 보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법치주의를 내세운 윤 후보의 이미지를 통해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을 덜고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이씨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윤 전 대통령이 내놓은 의대 증원 정책은 그에게 '의료 개혁'이라는 말보다 '일방통행'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윤 전 대통령은 의대 증원을 자신의 업적으로 여기며 끝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며 "양적으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정작 인력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한 전략은 보이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에 깊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윤 정부가 내세운 의료 개혁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사회적 합의' 과정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의대 증원, 필수 의료 패키지 등의 정책을 밀어붙인 탓에 정부와 의사 집단의 강 대 강 대치만 초래됐다"며 "결국 피해는 의료계뿐 아니라 시민과 환자들에게까지 고스란히 돌아갔다"고 지적했다.

그는 "호탕함인 줄 알았던 모습은 돌이켜보니 불통이었다"며 "비상계엄 사태까지 터지는 걸 보면서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던 것을 지금은 많이 후회한다"고 덧붙였다.

소통하는 대통령 필요해… "현장 공감 없는 정책으론 의료 개혁 불가능"

이씨는 제21대 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의 보건의료 공약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지만 아직 마음에 드는 후보는 없다고 했다. 사진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지난 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비전형 노동자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는 모습. /사진=뉴스1

31일 앞으로 다가온 제21대 대선, 선거판이 달아오르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난감한 표정이다. 투표를 해야 하는데 딱히 끌리는 선택지가 없다는 것. 이번에는 각 후보의 보건의료 공약 등을 꼼꼼히 따져보고 있지만 아직 마음을 정하진 못했다.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공약에 대해서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접근 방식이 아쉽다"고 평가했다. 이 후보는 공공의대 설립, 공공병원 확충 등을 핵심으로 한 보건의료 정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씨는 "공공의대 논의는 박근혜 정부를 비롯한 여러 정권에서 시도됐지만 의료계의 반발로 매번 무산됐다"며 "수가 체계 개편 등 핵심 쟁점에 대한 언급 없이 다시 공공의대 카드를 꺼낸 건 의료계와의 갈등을 반복하겠다는 뜻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공의대로 수년간 쌓아온 의학교육 체계가 흔들릴 수 있고 의사들이 지역에 머무르고 싶어도 열악한 수련·근무환경이 바뀌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꺼려진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후보가 "의대 정원 문제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풀겠다"고 밝힌 점은 긍정적으로 봤다. 이씨는 "윤 전 대통령처럼 숫자를 못 박는 방식이 아니라 전공의 등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태도는 갈등 해결에 더 가까워 보였다"며 "AI(인공지능)와 기술 변화까지 고려한 점도 전문성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씨를 포함한 상당수 의대생은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는 "이 후보가 필수 의료 수가 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많은 의대생의 공감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지율이 낮아 괜히 사표가 될까 봐 망설여진다"고 했다.

범보수 진영이 한덕수 전 총리와의 단일화를 추진 중인 데 대해서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의정 갈등의 책임이 있는 전 정부의 핵심 인물과 손잡는다면 투표하기 망설여질 것 같다"며 반감을 내비쳤다.

윤 정부를 겪으며 '강한 추진력'보다 중요한 것은 '소통과 설득'이란 것을 깨달았다는 그는 '소통하는 대통령'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진은 이씨가 서울 소재 의대 캠퍼스에 앉아있는 모습. /사진=김성아 기자

이씨는 이번 대선에서는 어떤 리더십을 가진 인물인지를 중점적으로 살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를 겪으며 '강한 추진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통과 설득'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는 그는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이제는 학생들 사이의 갈등으로, 더 나아가 국민과 의료계 전체의 불신으로 확산했다"며 "더는 이런 상처가 반복되지 않도록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조율할 수 있는 '소통하는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약에 대해서도 보다 정교하고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의료 현장의 당사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공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히 정원 확대나 공공의대 설립처럼 '공급 확대'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지역과 필수 의료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돕는 수가체계 개편, 인센티브 설계 등의 방안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남은 기간 후보들이 국민의 눈높이에서 진정성 있게 소통하고 말뿐인 약속이 아니라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공약을 제시해주길 바란다"며 "정책이 현실에 기반한다면 의료계도 결국 변화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