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틱 타이거'의 서막을 연 찰스 호히(Charles Haughey)의 삶에는 20세기 아일랜드 정치의 빛과 그림자가 함께 투영돼 있다. 사진은 아일랜드의 전 총리 찰스 호히의 흑백 초상. 1970~1990년대 아일랜드 정계를 대표했던 그는 과감한 개혁과 연이은 스캔들로 아일랜드 현대 정치사를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로 남았다. /사진=게티이미지


#"쇠사슬에 묶인 채 물탱크에 던져졌지만 그는 언제나 살아 돌아왔다." 20세기 초, 세상을 놀라게 한 탈출 마술의 대가 '위대한 후디니'(The Great Houdini)의 이야기다. 관 속에서도, 자물쇠로 봉인된 철창 속에서도 그는 매번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유럽 서쪽 끝 아일랜드에서는 '정치판의 후디니'라 불린 인물이 탄생했다. 경제 위기의 한복판에서 과감한 긴축을 단행해 훗날 '켈틱 타이거'(Celtic Tiger)라 불린 기적의 시대를 연 찰스 호히(Charles Haughey) 전 총리다. 호히는 숱한 추문과 스캔들로 몰락의 벼랑 끝에 섰다가도 번번이 권력의 중심으로 되돌아오며 아일랜드 현대 정치사를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로 남았다.

후디니의 탈출이 끝내 죽음 앞에서 멈췄듯 호히의 정치 인생에도 마지막 탈출은 없었다. 1991년, 언론인 불법 도청 사건에 호히가 연루됐다는 의혹이 재점화되면서 그는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나 정치 무대를 떠났다.


"나는 국가에 헌신했노라.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마지막 의회 연설에서 호히는 셰익스피어 비극 '오셀로'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정치 퇴장을 선언했다. 영광과 추락을 함께 안고 살았던 그의 삶은 20세기 아일랜드 정치의 초상으로 남았다. 그의 굴곡진 생애는 아일랜드가 가난에서 번영으로 넘어가던 격동의 시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긴축·사회연대협약·저세율 경제로 '켈틱 타이거'의 초석을 놓다

아일랜드의 혼란과 기회의 시대 속에서 찰스 호히는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권력의 정점인 총리에까지 올랐다. 사진은 1979년 12월7일자 아일랜드 일간지 이브닝 헤럴드(Evening Herald) 1면. 찰스 호히가 피아나 페일(Fianna Fáil) 신임 당수로 선출되며 아일랜드의 제7대 총리(Taoiseach)에 오른 소식을 전하고 있다. 불명예 해임에서 불과 10년 만에 권력의 정점에 오른 그의 복귀는 "쇄신과 강력함의 승리"로 평가받았다. /사진=아일랜드 신문 기록 보관

영국으로부터 아일랜드 독립의 여명이 밝아오던 1925년. 찰스 호히는 아일랜드 서부 메이요 주(County Mayo)에서 독립운동가 부모 밑,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병세 악화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지만 그 속에서도 어린 호히는 두드러진 학업 성취로 주목받았다. 장학금을 받아 더블린 대학교(UCD)에 진학한 그는 상업학을 전공하며, 훗날 그의 화려하면서도 부패한 경력의 토대가 된 정치인의 길을 닦았다.

호히는 1951년 아일랜드 정치의 거목 숀 레마스(Seán Lemass)의 사위가 되며 권력의 심장부로 들어섰다. 당시 레마스는 에이먼 드 발레라(Eamon de Valera) 총리의 후계자로 꼽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호히는 '엘리트 가문의 사위'라는 후광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두뇌와 특유의 카리스마, 그리고 대중을 휘어잡는 웅변으로 단숨에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1957년, 불과 33세의 나이로 더블린 북동부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30여년 동안 아일랜드 정치를 쥐락펴락한 호히는 정계의 '젊은 피'로 급부상했다. 총리직만 세차례(1979∼1981년, 1982년, 1987∼1992년)를 지냈으며 ▲법무장관(1961∼1964년) ▲농무장관(1964∼1966년) ▲재무장관(1966∼1970년) ▲보건·사회복지장관(1977∼1979년) 등 정부의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의 정치 이력은 개혁의 발자취로 기록된다. 특히 법무부 장관 시절 그는 상속법을 제정해 미망인과 자녀의 상속권을 법적으로 보장했다. 재산을 친척이나 교회에 넘기는 것이 관행이던 남성 중심 사회였던 탓에 당시엔 거센 반발이 일었지만 결과적으로 아일랜드 사회의 법적 평등을 한걸음 진전시킨 전환점이 됐다. 재무장관 시절에는 '호히 스타일'의 과감한 개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예술가들에게 세금 면제를 허용하는 파격적인 제도와 노인을 위한 무료 여행, 전기 보조금 지원 같은 복지 정책을 펼쳤다.

이처럼 호히는 진보적 개혁가로 존재감을 각인시켰지만 곧 치명적인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1970년, 북아일랜드에서 개신교(연합주의자·영국계)와 가톨릭(민족주의자·아일랜드계)의 갈등이 격화되자, 당시 재무장관이던 그는 정부 자금을 이용해 북아일랜드 민족주의자 무장조직(IRA)에 무기를 지원하려 한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법정에서 결정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1979년, 마침내 집권당 피아나 페일(Fianna Fáil)의 당권을 거머쥐며 권력의 정점, 아일랜드 총리 자리(Taoiseach)에 올랐다.

찰스 호히는 총리 집권 시절 긴축과 개혁을 통해 아일랜드를 빈곤의 섬에서 '켈틱 타이거'로 탈바꿈시켰다. 사진은 아일랜드 더블린 메리언 스트리트에 자리한 정부청사 단지(Government Buildings) 전경. 중앙의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에는 총리실(Department of the Taoiseach)을 비롯해 재무부와 공공지출개혁부 등이 함께 입주해 있다. /사진=김성아 기자

총리로서의 호히는 언제나 아이러니의 중심에 서 있었다. 한편으론 대담한 개혁과 사회정책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지도자였다. 의료 서비스의 접근성을 넓히고 낙후된 농촌 지역을 개발하는 한편,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한 원스톱 행정체계 구축과 외환 규제 철폐를 추진하며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한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의 정치 인생은 늘 스캔들과 논란 속에 요동쳤다. 특히 세번째 집권기(1987~1992)는 호히 정치의 명암이 가장 극명하게 교차한 시기였다.

당시 아일랜드는 재정 적자와 높은 실업률, 경기 침체에 시달리며 국가 부도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호히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과감한 공공지출 삭감과 긴축 재정을 단행했다. 동시에 정부·노동조합·경영계가 모두 참여하는 전례 없는 사회적 합의, '국가 회복 프로그램'(PNR)을 추진해 약 2년 만에 국가 부채 문제를 해결하는 성과를 달성했다. 이후 이 체계는 20여년 동안 이어지며 '사회연대협약'(Social Partnership)으로 발전했고 아일랜드 경제의 기적이라 불린 켈틱 타이거 시대를 가능케 한 제도적 토대가 됐다.

호히는 아일랜드 경제 구조의 대전환을 이끌 기반도 함께 마련했다. 그는 더블린 도크랜드 일대를 재개발해 국제금융서비스센터(IFSC)로 조성하는 대담한 계획을 추진했다. 정부는 이 지역을 특별경제구역(SEZ)으로 지정하고 EU의 승인을 받아 지정된 금융활동에 한해 10%의 파격적인 법인세율을 적용했다. 당시 재무부는 세수 감소 등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호히는 과감한 추진력으로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 결정은 훗날 아일랜드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삼는 '저세율 경제' 모델을 구축하는 초석이 됐다.

호히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아일랜드 사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사진은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찰스 호히 전 아일랜드 총리. 그는 '정치판의 후디니'로 불리며 수많은 정치적 위기를 돌파했지만 1992년 언론 도청 스캔들로 결국 정계에서 물러났다. /사진=게티이미지

하지만 굵직한 개혁의 발자취 뒤에는 언제나 스캔들과 비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호히는 정계 인사들과의 청탁·뇌물 거래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했고 출처가 불분명한 거액으로 호화 저택을 유지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27년 동안 유명한 언론인과 장기간의 혼외 관계를 유지한 사실마저 밝혀지면서 언론은 그를 딸기코(알코올 중독을 암시)에 여성 편력으로 얼룩진 호색한으로 조롱했다.

그럼에도 호히는 '정치판의 후디니'라는 별명처럼 수많은 정치적 파동 속에서도 번번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1991년, 1980년대 초 발생한 언론인 불법 도청 사건에 그가 연루됐다는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1992년 2월, 그는 총리직과 피아나 페일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며 "제가 떠나며 바라는 찬사 하나가 있다면 '그는 모든 국민을 위해 자신의 능력껏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는 말뿐"이라며 씁쓸한 인사를 남겼다.

호히의 바람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아일랜드 사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남아 있다. 비판과 존경이 엇갈리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아일랜드 정치사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는 것이다. 2006년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정부는 전립선암으로 생을 마감한 그에게 국장의 예우를 베풀었다. 사회연대협약과 외국인 투자 유치 등 그가 남긴 제도적 유산이 오늘의 아일랜드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