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는 수십 년간 일관되고 안정적인 조세 정책을 유지함으로써 외국인 직접투자를 성공적으로 유치하고 고부가가치 산업 중심의 경제를 구축했다. 사진은 아일랜드 더블린 구글독스. /사진=최유빈 기자


아일랜드는 유럽 변방의 작은 농업국에서 구글, 애플, 메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본사를 두는 '유럽의 비즈니스 허브'로 자리 잡았다. 극적인 변신의 배경으로 흔히 낮은 법인세율(12.5%)이 꼽히지만, 단순히 숫자 하나만으로 아일랜드의 성취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은 일관된 정책 운영이 기업의 신뢰를 쌓아 올린 더 큰 힘이었다. 실제 아일랜드는 금융위기의 고통 속에서도 법인세율만은 건드리지 않는 뚝심을 발휘했다.

농업국에서 '경제 대국'으로 진화

1950년대의 아일랜드는 고용난과 인구 유출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농업 이외에 변변한 산업이 없어 경제가 정체돼 있었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다른 나라로 떠났다. 이런 상황을 바꾼 것이 바로 '초청에 의한 산업화'(Industrialization by invitation) 전략이다. 정부가 직접 외국 기업을 유치해 산업화를 앞당기겠다는 발상이었다.

1956년 도입된 수출이익세 감면제도(Export Profits Tax Relief, EPTR)는 이 전략의 상징적 조치였다. 수출로 얻은 제조업 이익에 대해 절반만 세금을 내도록 했다가 곧 전면 면제로 확대됐다. 면세 기간도 처음 5년에서 10년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사실상 '세금 없는 환경'을 제공했다.


1970년대 말 EPTR 제도는 더 개선된 형태로 발전했다. 모든 제조업체에 대해 10% 특별 법인세율이 적용됐고 1987년에는 더블린 국제금융서비스센터(IFSC)에도 같은 세율이 주어졌다. 제조업과 금융이 동시에 세제 혜택을 누리면서 아일랜드는 IT·제약·금융 서비스 기업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박선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런던무역관 연구원은 "아일랜드는 낮은 세율을 기반으로 외국인 직접투자(FDI)를 적극적으로 유치했으며 이를 뒷받침 하는 연구개발(R&D) 세액공제, 투자 보조금 규제 완화 등의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했다"며 "이러한 정책 조합은 고부가가치 산업 중심의 수출 경제 구조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12.5% 단일 세율의 탄생

아일랜드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 리스트. /사진=IDA Ireland 홈페이지


아일랜드 정부는 법인세 정책에 반발하는 유럽연합(EU)의 완강한 거부로 2003년부터 전 산업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12.5% 단일 법인세율을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제조업과 일부 서비스업은 기존 10% 세율을 일정 기간 더 적용받을 수 있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모든 기업이 같은 세율을 적용받았다.

기업들은 이를 환영했다. 다른 국가들이 세율을 낮추더라도 복잡한 감면 규정과 차등 세율을 병행했는데 아일랜드는 단순명료하게 모든 기업에 똑같은 세율을 적용했다. 이 단순성과 예측 가능성이 기업들에게는 세율 인하 못지않은 강력한 신호로 작용했다.


글로벌 추세와 비교하면 아일랜드의 법인세율은 단연 파격적이었다.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법인세율은 30%대 초반이었고 미국은 35%, 독일은 약 38%, 프랑스는 33%였다. 영국조차 30%의 세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유럽 한복판에 위치한 저세율 섬'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며 아일랜드는 단숨에 투자 유치 경쟁에서 독보적인 매력을 갖게 됐다.

임유진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아일랜드는 세계 최저 수준의 12.5% 법인세율을 20년간 유지해왔다"며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조세정책 운영은 아일랜드를 매력적인 투자처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법인세 만은 안 된다"… 위기에도 굳건히 신뢰 지킨 아일랜드

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펍 중 하나인 더 템플 바(The Temple Bar Pub)에 이른 저녁부터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최유빈 기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아일랜드에도 큰 타격을 줬다. 은행 부실로 국제통화기금(IMF)과 EU의 구제금융을 받게 됐지만 정부는 법인세율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세율을 올려 당장 세금을 더 거두는 것보다 안정적인 제도를 유지해 기업들이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이 결정은 아일랜드 정치권에서도 거의 이견이 없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법인세는 아일랜드의 생명줄'이라는 인식이 공유됐다. 덕분에 위기 속에서도 다국적 기업들은 더블린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가 진정된 이후 투자 규모를 늘리는 기업도 있었다.

2021년에는 OECD와 G20는 글로벌 최저한도 15% 세율에 합의했다. 아일랜드도 참여를 결정하면서 대기업에는 15%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다만 매출 7억5000만 유로(약 1조2300억원) 미만의 기업은 여전히 12.5% 세율을 적용받는다. 국내 대부분 기업과 중소 다국적사에는 변화가 없는 셈이다.

'이제 아일랜드의 매력이 줄어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지만 현실은 달랐다. 다국적 IT·제약 기업들이 여전히 더블린에 남아 있을 뿐 아니라 PCI파마 서비스(PCI Pharma Services) 같은 기업들은 신규 공장을 세우며 투자를 늘렸다.

박 연구원은 "아일랜드의 기업유치 중심 경제모델은 단순히 낮은 법인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법제도·교육·외교·산업 정책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결과"라며 "수십 년간 유지된 안정적인 조세정책과 낮은 지정학적 안전성이 아일랜드를 매력적인 투자처로 만들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