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나라 잃은 시인이 별 헤던 언덕

한양도성 해설기 ㉞/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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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일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이에 서울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한 도성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주>
한양도성 인왕산구간 /사진=뉴스1 신웅수기자
한양도성 인왕산구간 /사진=뉴스1 신웅수기자


수성동계곡 오르막길 어귀에는 박노수 가옥(종로구립미술관·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이 있다. 통인시장을 지나 서촌골목길을 올라가면 나오는 이곳은 순종황제의 처삼촌이자 친일파인 윤덕영이 1938년 딸에게 지어준 2층 벽돌집이다.

한국, 중국, 서양식 건물양식을 한데 섞은 1930년대 호화주택양식이 특징이다. 총 3개의 벽난로가 설치됐고 1층은 온돌방과 마루, 2층은 마루방구조다. 현관은 포치를 설치해 아늑한 느낌을 주며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단순 박공지붕으로 장식적인 요소와 단순함이 어우러진다.

1972년부터는 박노수 화백이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했고 그가 죽은 뒤 2011년 종로구에서 건물과 소장품 1000여점을 기증받아 종로구립미술관으로 개관했다.

박노수는 충남 연기 출신으로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청전 이상범, 근원 김용준, 월전 장우성을 사사했다. 1955년 국전 대통령상 수상을 비롯, 대한민국예술원상 등 많은 상을 휩쓸었고 대한민국은관문화훈장도 받았다. 서울대와 이화여대에서 교수를 지냈고 국전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1983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회원으로 선정됐다.

그의 화풍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운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해 ‘전통 속에 현대적 미감을 구현한 작가’로 평가된다.


◆식민지 청년 설움 영근 동산

성곽은 인왕스카이웨이로 끊겼다가 청운공원에서 다시 이어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줄기의 마지막 언덕이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을 때 이곳에서 가까운 누상동에서 하숙했다. 그때 이 동산을 산책하면서 식민지 청년의 서러운 심정으로 가을밤의 별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 무렵 ‘별 헤는 밤’, ‘서시’가 탄생했다.

그는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신이다. 1941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같은 해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다. 1943년 7월 귀향 직전 독서회사건으로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교토제국대학생인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일경에 검거돼 2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꿈에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이국의 감옥에서 참혹히 옥사한 그가 이 언덕에 당장에라도 나타나 투명하도록 창백하고 지순한 얼굴로 시를 노래할 것만 같다. 이곳은 추상과 성찰의 언덕이며 자유정신을 고취하는 언덕이 됐다.

2012년 7월25일 시인의 언덕 인근에 윤동주문학관도 개설됐다. 버려진 청운 수도가압장을 개조해 만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에서 영감을 받아 재건축과정에서 발견된 5m 높이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한 점이 특이하다.

문학관 벽에는 “가쁜 숨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시민을 위해 폐쇄된 수도가압장에 윤동주의 시세계를 담아 영혼의 가압장 ‘윤동주문학관’을 만들었다”라고 적혀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성벽이 끝나는 지점에 이른다. 창의문이 건너편에 보이지만 바로 건너갈 수 없다. 창의문길이 성곽을 가로질렀기 때문이다. 창의문에 가려면 창의문길로 내려가서 벽산빌리지가 있는 곳으로 우회해야 한다.
창의문 /사진제공=허창무
창의문 /사진제공=허창무

◆서촌 세도가 시대 연 창의문 길목

창의문길을 건너면 길가에 ‘1‧21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순직한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서있다. 1‧21사태는 1968년 1월12일 새벽 북한의 특수부대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기습공격하기 위해 서울로 침입한 사건이다.

당시 순직한 최규식 총경의 동상에서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청계천 발원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이곳에서 북동쪽 백악산 정상 방향으로 약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했다”고 적혀있다.

영조 36년(1760년) 개천 준설 역사를 기록한 ‘준천사실’(濬川事實)에는 청계천 발원지를 “백악산 서쪽과 인왕산 동쪽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은 백운동으로 흘러오다가 원줄기는 구불구불 남쪽으로 흐른다”고 썼다. ‘도성대지도’ 등 옛지도에도 백악산 서쪽 창의문 부근을 개천 발원지로 표시했다.

그곳은 조선시대 청풍계(淸風溪)라고 부르던 곳으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이 살았던 집터 주변이다. 그 집터에는 ‘백세청풍’(百世靑風)이라는 글씨를 새긴 바위가 있다. 속기 떨친 자연 속에서 지조를 지키며 맑은 바람과 같은 삶을 누리겠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주역이었던 김상헌의 맏형으로 병자호란 때 인조의 비빈들과 왕자를(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자 그곳에서 자살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는 장남 김상용의 넷째 아우인 김상헌으로부터 시작됐다. 그의 후손이 세도가의 주류를 이뤄 이들을 ‘장김’이라고도 부른다. 그들 형제의 거주지가 서촌이었으므로 조선후기의 정치권력은 북촌에서 서촌으로 옮겨진 셈이다. 서촌은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주무대였으며 세도정치의 폐해는 국운을 좌우할 정도로 컸다.

참고로 경복궁 동쪽에서 창덕궁 사이를 북촌이라 하고 경복궁 서쪽에서 인왕산 사이를 서촌이라 불렀다. 북촌에는 삼청동, 가회동, 재동, 안국동, 계동, 원서동이 있고 서촌에는 적선동, 사직동, 체부동, 옥인동, 효자동, 청운동 등이 포함된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33호(2018년 3월28일~4월3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email protected]

바퀴, 날개달린 모든 것을 취재하는 모빌리티팀 박찬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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