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지난 1998년 8월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바 있다. 당시 모스크바 상점들은 일제히 문을 닫았다. 돈 가치가 계속 떨어지는 만큼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현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길게 줄을 섰다. 화폐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물건을 사두기 위해서다.
러시아에서 이러한 초인플레이션의 악몽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커지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최근 러시아 리스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세계는 긴밀히 얽혀 있다. 세계 GDP(국내총생산) 9위 국가인 러시아가 추락하면 당연히 한국에도 영향이 온다.
지난 17일 한국은행은 최근의 러시아 루블화 폭락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FOMC회의 결과가 국내외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점검하기 위해 통화금융대책반 회의를 열었다. 한은은 최근의 러시아 루블화 폭락 여파가 여타 신흥국에 미칠 경우 우리나라 외환시장 및 채권시장의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 등을 면밀히 살피고 시장 참가자 사이에서 과도한 불안심리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부가 개입해 긴밀히 협의할 방침이다. ‘불곰’ 러시아는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 ‘98년의 악몽’ 돌아올까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공포가 커지고 있지만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관측을 내놓았다. 지표상 과거 1998년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
이남룡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정부 이자비용의 완화, 경상 및 자본수지 등의 펀더멘털 양호, 대외채무·외환보유고 등을 감안하면 지난 1998년의 재현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998년 러시아의 이자비용은 정부예산 대비 37.2%였다. 현재는 2.9% 수준이다. 또한 GDP 대비 경상수지는 2.35%, GDP 대비 자본수지는 -0.03%다. 대외채무와 외환보유고 역시 양호하다. 러시아의 GDP 대비 대외채무는 지난 1998년 48.1% 수준에서 현재 34.7% 수준으로 개선된 상태다. 외환보유고는 1998년 GDP 대비 1.9% 규모에서 올해 기준으로 17.8% 정도다.
이 애널리스트는 “이번 러시아 리스크는 심리적인 요소가 크다”면서 “루블화 가치가 며칠 만에 20~30%씩 급락하고 금리 650베이시스포인트(bp)를 하루에 올리니 두려움을 갖는 것인데, 지표 수치상으로는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이나 디폴트를 선언할 정도까지는 아니다”고 단언했다.
문제는 이번 위기의 해소 방안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러시아의 경제 위기는 내부적인 문제가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했다. 크림반도 병합과 관련된 서방국가의 제재와 국제유가 급락세에 따른 것이다.
결국 러시아 리스크가 해결되려면 ‘바깥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 내부에서 할 수 있는 방안은 많지 않다. 금리인상 정도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 16일 오전 6시30분(현지시간) 기준금리를 현행 연 10.5%에서 17.0%로 650bp 올렸다. 이는 올해 들어 여섯번째의 금리인상이며, 지난 11일 9.5%였던 기준금리를 10.5%로 100bp 인상한 지 5일 만에 행해진 조치다.
![]()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
러시아가 금리를 대폭 올린 것은 루블화의 가치 폭락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하지만 시장은 공포를 버리지 못한다. 루블화는 러시아 현지시간으로 지난 16일 모스크바 외환시장에서 금리인상 발표 직후 잠시 반등하는 듯 했으나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이날 오후 3시께 유로 대비 루블화 환율은 전날보다 22루블이 오른 100.74루블, 달러 대비 루블화 환율은 전보다 15루블 이상 오른 80.1루블을 기록했다. 루블화 가치가 전일대비 10%가 넘게 떨어진 것.
통상적으로 금리 인상은 물가의 상승압력을 가중시킨다. 러시아 경제를 더욱 침체로 몰아넣을 수 있는 극단적인 수준의 금리인상이라는 ‘극약처방’도 힘을 쓰지 못한 것이다.
임동락 한양증권 애널리스트는 러시아정부가 금리인상에 나섰지만 이는 러시아의 내수를 위축시켜 펀더멘털 약화로 이어지게 하는 악순환 구도를 만든다고 평가한다.
임 애널리스트는 “경기침체에도 오히려 물가는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금리인상 조치만으로 현재의 러시아 경제불안이 해결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 전염 가능성 배제 못해
글로벌시장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번 ‘러시아 리스크’의 전염 가능성이다. 임동민 교보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인접국으로 부정적 영향이 전염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특히 터키의 경우 정국 불안, 재정 및 경상적자에 대한 경제위험 우려가 크다”고 설명했다.
안나 스텁니스카(Anna Stupnytska) 피델리티 글로벌 이코노미스트 또한 “현재 러시아의 상황은 지난 1998년 당시보다 낫지만 전염될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면서 “러시아는 현재 서방국가의 경제제재로 인해 국제 자금시장과 단절되면서 기업들은 부채를 조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정부가 더 위험한 사태로 진행되기 전에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고 중앙은행도 주요 은행들을 지원하겠지만 소규모 은행을 중심으로 디폴트 가능성이 있다는 것.
러시아 국민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외신 등에 따르면 러시아 모스크바 시내에서는 달러화나 유로화로 환전하려는 고객 행렬이 줄을 잇고 있으며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 조짐도 보인다.
스텁니스카 이코노미스트는 “국제유가의 향방에 많은 것이 달려 있지만 러시아의 경우 우크라이나 분쟁, 경제제재, 취약한 제도, 부패 등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면서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러시아와 관계가 밀접한 국가들도 통화가 큰 폭으로 절하되면서 러시아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국내로의 전염 가능성이 현재까지는 높지 않다는 점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러시아에 대한 지난 9월 말 기준 국내 금융회사의 외화익스포저(외화대출금, 외화유가증권, 외화지급보증의 합계) 규모는 13억6000만달러다. 인도네시아(42억4000만달러)나 인도(26억7000만달러) 대비 현저히 낮은 수치다.
금감원 관계자는 “러시아의 금융불안이 국내 금융시장에 미치는 직접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다만 무역 및 금융연계가 높은 유로존이나 주변 국가로의 파급 효과 확대 등 외부 전이 가능성이 있어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6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