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멘트가 ‘회장님의 전쟁’으로 시끄럽다. 지난달 1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50부로 진행된 재판에서 경영권 분쟁과 관련해 가처분신청을 낸 정몽선 전 현대시멘트 회장(61)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회사의 대규모 부실을 초래한 장본인은 자신이 아닌 전·현직 경영진이라는 것.
정 전 회장은 지난달 1일 이주환 대표이사와 임승빈 전무 등 현대시멘트 경영진을 상대로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소송을 냈다. 앞서 지난 7월30일에는 김호일 부회장을 포함한 전 경영진 4명도 횡령·배임 혐의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혐의발생금액은 대략 5480억원.
현대시멘트 이사회는 즉각 맞불을 놨다. 가처분신청을 낸 당시 정 회장을 지난달 7일 해임하고 이주환 사장 단독대표체제로 변경했다.
◆ 해임된 정몽선 "전·현직 경영진이 부실 초래"
재계에서 회장이 전·현직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 ‘회장님의 전쟁’은 수년에 걸쳐 성우종합건설에 제공한 채무보증에서 불거졌다.
현대시멘트의 자회사인 성우종합건설은 지난 2000년 초부터 양재동 복합물류센터(파이시티), 영종도 하늘도시(천일건설), 용인 송전지구(일우건설), 양평 양근리 주상복합(정림플러스) 등의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현대시멘트는 그런 성우종합건설의 차입금에 대해 채무보증을 제공했고 지난 2009년 말 기준 채무보증 총액은 무려 8000억원에 달했다.
특히 파이시티 사업에 대한 지급보증의 규모가 컸다. 이 프로젝트는 양재동 옛 화물터미널 부지 9만6017㎡(2만9045평)에 물류센터, 오피스 빌딩, 쇼핑몰 등을 짓는 대규모 사업. 지난 2007년 현대시멘트는 파이시티 개발사업 시행사로 선정된 성우종합건설에 5150억원을 지급보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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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사업은 이명박 정부 시절 인허가 과정에서 특혜 시비가 불거져 중단됐다. 성우종합건설의 채무를 모두 떠안은 현대시멘트는 현금 유동성이 나빠지고 재무구조가 부실해져 결국 지난 2010년 6월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성우종합건설 역시 워크아웃에 이어 지난해 말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황.
정 전 회장은 소 제기 당시 "파이시티 개발사업을 진행하면서 회사는 제대로 된 실사도 하지 않고 수천억원대 자금을 성우종합건설에 지원했다”며 “잘못된 지원인데도 현대시멘트가 이자를 부담하게 되면서 현재의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고 가처분 신청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이 대표 등 현대시멘트 경영진은 정 전 회장이 말한 계열사에 대한 불법자금 지원 당시에는 자신들이 이사 직위에 있지 않았고 자금 지원 이후에 취임했다는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 현대의 적통, 몰락하는 오너
이번 현대시멘트의 경영권 분쟁은 자회사에 대한 대규모 채무보증이 회사의 운명을 좌우했다는 것과 동시에 현대에 뿌리를 둔 기업의 오너가 몰락했다는 점에서도 재계의 관심을 끈다.
성우그룹의 모태인 현대시멘트는 지난 1970년 현대건설 시멘트사업부에서 독립한 회사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둘째 동생인 고 정순영 (현대시멘트) 명예회장에게 ‘떼 준’ 기업. 그만큼 ‘현대’라는 상징성과 역사가 담긴 곳이다. 정몽선 전 회장은 고 정순영 회장의 장남이다.
정몽선 전 회장은 지난 1987년 부친으로부터 현대시멘트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이후 30년 가까이 경영을 총괄하며 연간 3000억~4000억원의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시켰다. 시멘트 외에 레저, 건설, 운수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추진한 건설 사업이 난항을 겪으면서 결국 선대 회장 때부터 일궈온 핵심 사업 기반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 특히 대표이사 회장직에서 해임되는 등 그는 최대주주 지위에 이어 경영권까지 빼앗기면서 현대시멘트와 강제 이별할 처지에 내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정 전 회장은 2013년 말까지 현대시멘트 지분 29.31%를 보유한 최대주주였으나 지난해 채권단의 무상감자와 출자전환으로 지분율이 2.46%로 줄어들었다. 현대시멘트가 자본잠식에 빠져 상장폐지 위기에 처한 터라 채권단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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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 경매로 나온 정몽선 전 회장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 /사진제공=지지옥션 |
◆ 자본잠식에 워크아웃 연장… 운명은?
출자전환에 따른 지분율 축소로 정 전 회장은 현대시멘트에 대한 지배력을 사실상 상실했다. 그는 올해 초 서울 한남동 자택을 매각한 데 이어 지난 7월 부친인 정순영 회장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광주의 토지와 건물을 경매에 내놓는 등 현대시멘트에 투입할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허사가 됐다.
시멘트업계는 정 전 회장이 전·현직 경영진과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울 경우 내년 워크아웃이 종료되더라도 그가 경영권을 되찾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시멘트로서도 현재 기업 안팎의 상황이 녹록지 않다. 산업은행, 국민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등으로 구성된 채권금융기관협의회는 지난 2010년 6월부터 지난해 3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현대시멘트를 지원했다. 당초 지난해 워크아웃을 졸업할 예정이었지만 경영 정상화가 더디다는 판단에 따라 종료 시점을 2016년까지 2년 연장했다.
실제 현대시멘트는 매분기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지난 6월 말 기준 또다시 완전자본잠식에 돌입했다. 여기에 성우종합건설의 매각이 난항을 겪으면서 채권금융기관 협의회의 추가 출자전환도 불투명해졌다. 지난달 21일에는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로부터 횡령·배임혐의에 대한 지연공시로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시멘트업계에서 꾸준히 점유율 10%선을 지키며 4~5위에 랭크돼온 현대시멘트. 가뜩이나 부진한 실적으로 신음하는 상황에서 경영진 간 심각한 내홍까지 겹쳐 기업재건의 목표는 더 멀어진 듯하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0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