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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MZ세대로 불리는 젊은층 사이에서 ‘리셀’(re-sell·되팔기)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하면서 중고시장을 키우고 있다. /디자인=김민준 기자 |
#. 고등학생 김모군(18)은 요즘 ‘플렉스’(Flex·부를 과시하는 행동)에 푹 빠졌다. 김군은 6개월에 한 번 꼴로 한정판 운동화나 명품 티셔츠 등을 구매한다. 미성년자인 그가 플렉스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중고거래 덕분이다. 김군은 “한정판 운동화 발매 날이면 매장 앞에 대기해 구매하고 몇 달 신다가 온라인 중고 사이트에 판다”며 “신던 신발이라도 되팔 땐 수십만원의 웃돈이 붙는다. 그 돈으로 또 플렉스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고거래가 달라졌다. 남이 쓰던 낡은 물건을 저렴하게 구매하는 ‘짠물 소비’에서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값비싸게 사는 ‘가치 소비’로 그 인식이 바뀐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 ‘리셀’(re-sell·되팔기)이 중고시장을 키운다는 평가다.
왜 중고시장에 주목하나
국내 중고시장 규모는 약 20조원으로 추정된다. 2008년 4조원에서 10여년 사이 5배 성장한 것이다. 중고시장 성장 배경엔 불황이 자리한다. 통상 경기가 나빠질수록 중고거래는 활발해진다. 최근 들어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악화가 중고거래의 활성화를 뒷받침한다. 무급휴직 등으로 인해 줄어든 소득을 중고제품을 팔아 보완하려는 시도다.
중고거래 플랫폼의 발달도 시장 성장을 이끌었다. ▲네이버 카페에서 시작한 ‘중고나라’ ▲반경 6㎞ 이내에 있는 사용자와 거래하는 지역 기반 직거래 플랫폼 ‘당근마켓’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해 중간 배송을 담당하는 ‘땡큐마켓’ ▲투명박스를 설치해 비대면으로 물건을 직접 확인하고 결제하는 ‘파라바라’ 등이 대표적이다.
업계에선 무엇보다 가치 소비 트렌드에 주목한다. 단순히 저렴한 가격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찾아 중고시장에 진입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개성 있는 빈티지 제품이나 한정판 제품 등의 거래가 대표적이다. 돈이 있어도 못 사는 희귀한 아이템을 구하기 위해 부유층도 중고시장에서 발품을 팔 정도다.
샤테크·슈테크… 돈이 되는 중고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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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3일 대구 중구 현대백화점 앞에서 시민들이 샤넬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줄지어 백화점 개장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뉴시스 |
반대로 판매자는 재테크의 일환으로 중고시장을 찾는다. 이른바 ‘리셀러’(reseller·재판매상)다. 한정적이고 희소성이 높은 제품을 구매한 뒤 중고시장에 ‘프리미엄’(웃돈)을 붙여 판매한다. 용돈벌이나 취미생활로 리셀을 즐기는 부류도 있지만 전문 리셀숍을 운영하는 사업자도 존재한다.
리셀 광풍은 ‘샤테크’(샤넬+재테크), ‘슈테크’(슈즈+재테크) 등의 신조어를 낳았다. 명품 브랜드 제품이나 한정판 운동화를 미리 사두면 추후 시세 차익을 남길 수 있어 쏠쏠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지난 5월에는 샤넬의 가격 인상과 관련된 소문이 돌자 리셀러가 활개쳤다. 당시 주요 백화점에서는 오픈과 동시에 매장으로 달려가는 ‘오픈런’ 현상이 벌어졌다. 이처럼 어렵게 구매한 제품은 며칠 뒤 샤넬이 가격을 인상하자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웃돈이 붙어 올라왔다. 가격이 오르기 전에 구입해서 되팔고 100만원가량의 시세차익을 남겼다는 후기도 이어졌다.
소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1980~2000년대 출생자) 사이에서 리셀은 신종 재테크 수단으로 각광받는다. 중고거래 플랫폼 번개장터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거래액 가운데 MZ세대의 비중은 약 60%를 기록했다. 손에 쥔 돈은 부족하지만 취향을 소비하는 데 익숙한 MZ세대는 주식이나 부동산에 비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리셀을 하나의 재테크로 선택한다.
특히 10대~20대 리셀러가 주목하는 품목은 신발이다. 나이키나 아디다스처럼 마니아층이 확실한 브랜드가 한정판 제품을 출시하면 며칠씩 매장 앞에서 캠핑하며 대기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 역시 며칠 뒤면 웃돈이 붙어 중고시장에서 거래된다.
지난해 나이키가 빅뱅의 지드래곤과 협업해 한정 출시한 운동화 ‘에어포스1 파라-노이즈’의 경우 구매 응모권 제출에만 평균 4시간이 넘는 대기시간이 소요됐다. 리셀 가격도 대폭 뛰었다. 출고가 21만9000원이던 빨간색 로고 모델은 현재 중고시장에서 300만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수익률을 따지면 무려 1270%에 달한다.
리셀시장 판 키우는 유통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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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자회사 스노우는 지난 3월 한정판 스니커즈 리셀 플랫폼인 '크림'을 선보였다. 사진은 크림 오프라인 쇼룸. /사진제공=네이버 |
중고시장이 성장하면서 유통업계도 앞다퉈 리셀을 겨냥한 한정판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최근 ‘품절 대란’을 빚은 스타벅스의 여름 한정판 증정품이 대표적이다. 스타벅스는 5월 말부터 캠핑 의자인 ‘서머 체어’와 여행 가방인 ‘서머 레디백’을 증정하는 여름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다.
해당 증정품을 받으려면 미션 음료 3잔을 포함해 총 17잔을 구매해야 한다. 음료 값으로 드는 돈은 최소 7만원 정도로 진입 장벽이 낮지만은 않다. 하지만 프로모션이 시작되자마자 증정품이 품귀현상을 빚었고 온라인에서는 곧바로 리셀이 시작됐다. 현재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는 ‘서머 레디백’이 8만~10만원에 재판매되고 있다.
아예 리셀 시장에 뛰어든 기업도 있다. 최근 강력한 쇼핑 채널로 급부상한 네이버는 지난 3월부터 리셀 중개업을 시작했다. 네이버 자회사 스노우가 선보인 한정판 스니커즈 리셀 플랫폼 ‘크림’ 이야기다. 국내 10번째 유니콘 기업인 온라인 패션 플랫폼 무신사도 이와 유사한 플랫폼인 ‘솔드아웃’을 오픈했다.
물론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리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다. 불로소득이라는 인식과 세금 문제, 사기 피해 등 사업의 불투명성 때문이다. 하지만 대기업까지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데다 리셀이 전세계적인 문화 현상으로 정착하면서 리셀시장, 나아가 중고시장은 앞으로 더욱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패션업계에서 시작된 리셀 열풍이 최근 스타벅스, 할리스커피 등 커피전문점 ‘굿즈’로까지 번졌다”며 “시장 성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기업도 한정판 마케팅이나 거래 플랫폼 시장에 관심을 가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