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자 등의 명문이 새겨진 백제 은팔찌중 하나와,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해당 팔찌 1쌍, 이를 관람하는 공주시 이존관 부시장.(위에서 시계방향) /사진=이병렬기자
제작자 등의 명문이 새겨진 백제 은팔찌중 하나와,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중인 해당 팔찌 1쌍, 이를 관람하는 공주시 이존관 부시장.(위에서 시계방향) /사진=이병렬기자

올해 충남 공주의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국보 160호 ‘무령왕비 은팔찌’가 서기 520년에 만들어진지 1500년이 된다.
특히 10개의 천간(天干)과 12개의 지지(地支)로 이뤄진 간지를 단위별로 나눈 60갑자의 25번째 경자년 원년이다.

개별 간지가 처음으로 되돌아 오기까지 60년이 걸리는데 제작 후 60년씩 스물다섯 바퀴를 돌아 찾아온 올해가 경자년이니 그 의미는 더욱 깊다.


김정섭 시장은 “무령왕릉은 물론, 안에서 출토된 왕비 팔찌 등 수많은 유물은 공주시의 자부심 자체” 라며 “왕릉 발굴 50주년을 맞는 2021년에는 대백제전을 개최해 그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팔찌는 1971년 송산리 5호와 6호 무덤 사이의 배수로 정비 과정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목관 내에서 나왔다. 당시 고분에서는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었음을 알리는 묘지석과 함께 108종 29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졌다.

그 중 5쌍의 팔찌가 모두 왕비 쪽에서 발견됐는데 금팔찌 1쌍과 은팔찌 1쌍이 왕비의 팔목 위치에 놓여 있었다. 국보로 지정된 것은 왼쪽 손목에 끼워졌던 것으로 알려진 은팔찌 1쌍이다. 두께 1.1㎝ 바깥지름 8㎝크기로, 전체적인 윤곽이 깔끔하고 중후하다.


특히 팔찌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卅主耳(경자년이월다리작대부인분이백삽주이)’라고 새겨져 있다.

직역하면 ‘경자년 2월 다리라는 사람이 대부인용으로 은(銀) 230주를 들여 만들었다’는 뜻이다. 대부인은 무령왕비를 지칭하는 표현인데, 왕비 승하 6년전 제작된 팔찌라는 추론이 나온다.

이백삽은 은팔찌에 투여된 은의 양이며 ‘주(主)’ 또는 ‘주이(主耳)’란 무게의 단위로 보인다. 팔찌의 무게는 160g정도다.

이현숙 공주대 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사용자는 물론 제작자(다리)의 이름과 도량형 무게단위(주이)까지 정확히 새겨져 있어 당시 시대상을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특히 금속판의 뒤쪽에서 정으로 두드려 일정한 면이 도드라지면 앞쪽에서 다듬어 부조 효과를 내는 타출기법(打出技法)으로 두 마리의 용을 좁은 공간 안에 표현한 것은 백제시대 공예의 정수로 여길만 하다”고 말했다.

메탈로 만든 액세서리는 고분시대에 접어들어 관·귀고리·목걸이·팔찌·반지 등 몸을 치장한 수많은 장신구를 부장품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진다.

작가들은 금속공예 작품에 담긴 주요한 관점으로 ‘생명의 신성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작품의 제작 과정에서 그려내고 만지고 깎고 두들기며 다듬는 수많은 고독한 작업을 통해 혼신의 힘을 다 쏟기 때문이다.

왕비의 피부에 닿는 장신구를 만들기 위해 당시 백제의 장인(匠人) 또한 셀 수 없는 망치질과 정성스러운 땜질을 했을 것이다. 고도의 인내력과 집중력도 발휘됐을 터, 그래서 은팔찌는 메탈의 차가움보다 온기로 남은 장인의 숨결을 1500년 뒤 오늘날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