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자 샤 팔라비. (출처: Ghazarians(1973),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레자 샤 팔라비. (출처: Ghazarians(1973),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79년 1월 16일, 이란은 역사적인 소용돌이 속에 휩싸였다. 팔라비 왕조의 마지막 국왕,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는 이슬람 혁명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권좌에서 쫓겨나 망명길에 올랐다.
레자 샤 팔라비는 1953년 미국 CIA가 주도한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서구의 지원을 받아 이란을 근대화하고 산업화를 추진했지만,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와 서구 문화의 유입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석유 자원 개발 과정에서 발생한 부패와 불평등은 민중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1978년부터 이란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됐고,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이슬람 혁명이 성공했다. 레자 샤 팔라비는 혁명의 위협을 느끼고 가족과 함께 이집트로 망명했다. 팔라비 왕조는 25년 만에 막을 내렸고,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으로 재탄생했다.


레자 샤 팔라비는 망명 이후에도 이란의 복고를 꿈꾸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지만, 이슬람 공화국의 굳건한 기반을 흔들지는 못했다. 그의 통치는 서구화와 근대화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독재와 부패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 그는 1980년 7월 27일 이집트에서 사망했다.

레자 샤 팔라비의 몰락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부상으로 이어졌고, 이는 이란 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중동 전역에 이슬람 근본주의가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중동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반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는 이후 미국과 중동 국가 간의 관계에 지속적인 갈등 요소로 작용했다.

레자 샤 팔라비의 몰락은 서구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잡았지만 민중의 소리를 외면하고 독재를 이어간 결과다. 또한, 이슬람 혁명은 서구 문화의 유입과 근대화에 대한 반발이라는 종교와 정치, 사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