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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화전민 집안의 '흙수저',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소년공', 비(非)운동권 비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 외 대학) 출신, 성남 빈민가의 인권변호사…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재명 당선인이 걸어온 삶의 궤적에는 '비주류'의 흔적이 가득하다. '부패 기득권 타파'를 외쳐온 이 당선인의 64년 인생에는 '학연'·'지연'·'소속된 집단' 없이 관례와 관행, 기득권에 맞서 싸우다 역설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서게 된 과정이 담겨 있다. 참혹했던 어린 시절을 딛고 한 소년이 국가 지도자로 성장하게 된 5가지 장면을 되짚어 본다.
① 참혹했던 어린시절, '억강부약' 정치철학의 토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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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23일, 경북 안동 예안면 도촌리의 깊은 산골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이 당선인의 유년은 가난과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가족에게 냉담했던 아버지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아들의 출생일조차 헷갈려했던 어머니 밑에서 빈곤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아버지는 홀연히 고향을 떠났고 어머니는 산속 밭을 일구며 자녀들을 키웠다.
1976년 2월,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열세살 소년은 성남 상대원동 언덕배기에 자리한 반지하 단칸방으로 향했다. 아버지와 형이 터를 잡고 있던 낯선 도시의 첫인상은 고향 산골 보다도 더 열악했다. 이 당선인의 가족은 상대원 시장을 생활터전으로 삼았다. 아버지는 시장 청소부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고 어머니와 사춘기 여동생은 시장 화장실을 청소했다. 형제들과 이 당선인은 모두 시장 옆 공단으로 흩어져 소년공 생활을 시작했다.
열세살에 소년공이 된 그는 목걸이 공장, 고무공장, 냉장고 공장 등을 전전했다. 콘아이스크림의 가격이 130원이던 시절 일당 500원가량을 받고 저녁 10시까지 야근, 새벽 2시까지 철야작업을 견뎌야 했다. 결국 모터벨트에 손이 끼이는 사고를 당해 손톱 밑에 고무가루가 박히고 프레스 사고로 왼팔 관절을 다쳐 6급 장애인 판정까지 받았다.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이 당선인에게 살 길은 공부뿐이었다. 1978년 4월 고입검정고시 야간반에 등록했다. 아버지는 공부 때문에 생계 전선에서 이탈하려는 이 당선인에게 "착실히 일이나 할 것이지 뭔놈의 공부냐"고 호통쳤지만 끝내 고입 검정고시 학원 야간반을 다니겠다는 아들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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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여름, 오리엔트주식회사에 취직해 시계 표시판 도장·도금 작업을 맡았다. 밀폐된 작업실은 독한 화공약품 냄새로 숨쉬기조차 힘들었지만 남들 눈을 피해 책을 펼칠 수 있는 은신처이기도 했다. 공장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공부에 매진한 끝에 이 당선인은 같은 해 8월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4월 대입 검정고시까지 통과했다.
소년공으로 보낸 6년, 기름때 묻은 손으로 쌓아 올린 이 시간들은 훗날 그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억강부약'(특권과 반칙에 기반한 강자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을 보듬는) 정치 철학의 토양이 됐다. 이 당선인이 "성남시장 8년, 경기도지사 3년 동안 제 모든 정책에는 가난하고 참혹했던 저의 삶과 평범하고 어려운 우리 국민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다"고 강조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② 사시 합격, 노무현과의 만남… '민중의 대변자'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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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이 당선인은 3년 등록금 전액 면제와 월 20만원 생활비 지원을 받으며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 입학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장애 탓에 '정상적인' 회사에 취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다시는 공장 노동자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다짐, 그리고 막연한 신분 상승의 욕망. 이 모든 것이 그를 신림동 고시원과 산속 절간으로 몰아넣었다. 끝내 그는 대학교 4학년이던 1986년 사법시험 최종 합격의 문턱을 넘어섰다.
민주화의 잔향이 한국 사회를 휘감던 1988년 어느 주말, 성남YMCA 회관 앞에서 당시 빈민운동가였던 이상락(훗날 열린우리당 의원)과 사법연수생이었던 이 당선인이 만나게 됐다. 그날 이후 이 당선인은 YMCA 시민중계실에서 무료 법률 상담 봉사를 시작했다. 그는 일당을 받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와 부당한 대우를 견뎌야 했던 여공,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부녀자들과 마주 앉았다. 그들의 사연을 듣는 순간이면 자신의 소년공 시절이 떠올라 결코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약자를 위한 변호사'라는 진로를 굳혀 나갔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당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떨치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연을 듣게 되면서다. 그때부터 그의 꿈은 판·검사로서의 부와 안락이 아니라 억눌린 이들과 함께 싸우는 인권변호사로 확고히 굳어졌다.
이 당선인은 1989년, 제2의 고향 성남에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다. 가난한 이들과 강력범죄, 철거민이 많던 성남에서 그는 기득권 부패와 싸우고 고통받는 민중의 대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구속 노동자 무료 변론, 광주 노동상담소 개설 등 '노상 변호사'로 현장을 지킨 그는 2006년 자신의 블로그에 "그들에게 가장 쓸모 있는 도구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난에 쫓겨와 소년 노동자로 뼈아픈 시절을 보낸 내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이 시기 그는 피아노 전공자였던 김혜경 여사를 셋째 형수의 소개로 만나 약 1년의 열애 끝에 결혼해 두 아들을 두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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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노상 변호사'로 현장을 지킨 청년, 정치길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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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이재명'은 성남에서 시민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성남시민모임'을 결성해 ▲2000년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 변경 특혜 의혹 ▲2002년 분당 파크뷰 특혜 분양 사건 ▲2004년 성남 공공의료원 설립을 위한 주민발의 조례안 등 지역 현안에 대한 감시와 개혁 요구에 앞장섰다. '정치인 이재명'으로 향하는 결정적 분기점도 이 시기에 찾아왔다. 성남 구도심의 대형 병원 폐쇄로 인한 의료 공백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시민 20만명의 서명을 받아 성남의료원 설립 조례안을 주민발의로 시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그 조례안은 단 47초 만에 폐기됐다.
의료 공백 속에서 무너지는 삶의 현장을 직접 마주한 그는 직접 시장이 돼 시립의료원을 만들겠다 결심했다. "사람들의 삶에 대한 고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그들을 내몰아야 한다는 의무감, 고통스런 삶을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이 정치 진입을 결심하게 했다. 그렇게 정치인 이재명이 탄생했다.
2006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성남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고배를 마셨고 2007년 대선에서는 정동영 후보 비서실 수석부실장을 맡았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성남 분당갑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 당선인은 2009~2010년 민주당 정세균 대표 체제에서 부대변인을 맡았는데 이것이 당대표로 등장하기 전까지 그의 유일한 여의도 정치 경험이다.
'정치인 이재명'의 첫 승리는 2010년 성남시장 재도전에서 이뤄졌다.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그는 취임 11일 만에 성남시의 채무 불이행(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강수를 뒀다. 이후 공무원 인사비리 척결과 재정 정상화 등을 앞세워 2014년 재선에 성공했다. 성남시장 시절 그는 무상 교복, 무상 공공산후조리 지원, 청년배당 등 '보편적 복지' 정책을 앞세워 '이재명표 브랜드'를 확립했다. 당시의 '무상 시리즈'는 이 당선인의 저돌적인 정책 추진력을 상징하는 대표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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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변방의 장수'에서 '전국구 정치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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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장으로 재임 중이던 2016년, 이 당선인은 또 한 번 정치적 변곡점을 맞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자 그는 가장 먼저 '탄핵'을 외치며 중앙 정치권의 주목을 받았다. 돌직구 발언과 사이다 행보로 견고한 팬덤을 구축하며 2017년 조기 대선에 출마한 그는 더불어민주당 경선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57.0%)과 안희정 전 충남지사(21.5%)에 이어 21.2%로 3위를 기록했다. 이름 없는 변방의 언더독으로 시작했지만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란 평가를 받으며 전국구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2018년, 이 당선인은 경기도지사에 도전해 당선됐다. 이 기간 계곡 불법 영업 철거와 코로나19 종교집회 전면금지 명령 검토, 전국 최초 재난기본소득 도입 등 과감한 행보로 전국적 주목을 받았다. 동시에 기본소득·기본금융·기본주택 등 '기본 시리즈' 정책을 구체화하며 차기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2021년, 그는 다시 한 번 대권에 도전했다. 당내 기반이 약했지만 대중성과 정책 드라이브로 돌파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낙연 전 총리를 꺾고 본선에 진출했으나 본선에서 윤석열 후보에게 0.73%p(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다. 이 당선인은 패배 후 곧 중앙 정치로 복귀했다. 그는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같은 해 8월 민주당 당대표에 선출됐다.
하지만 여의도 정치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대장동 개발 특혜와 변호사비 대납, 쌍방울 그룹 연루 의혹 등 각종 사법 리스크가 발목을 잡았다. 친문계와의 갈등도 깊어졌다. 2023년 가을, 결국 체포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되며 정치적 위기를 맞았지만 법원은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그를 다시 정치 전면에 세웠다.
2024년 1월, 부산 북항 방문 중 괴한의 흉기에 목을 찔리는 정치 테러를 당했지만 서울로 이송돼 응급 수술을 받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로부터 석 달 뒤 치러진 제22대 총선에서 민주당 172석이란 압승을 이끌며 정치권의 중심에 섰다. 같은 해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85%라는 역대급 득표율로 재선출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24년 만의 당대표 연임이었다.
⑤ 불법 비상계엄으로 빨라진 이재명의 '대권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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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이후, 3년 뒤를 준비하던 이 당선인의 대선 시계는 지난해 12월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불법 비상계엄 선포로 급격히 빨라졌다. 헌법재판소가 지난 4월4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 결정을 내리면서 '대권 삼수생' 이 당선인의 대권 가도는 활짝 열렸다.
참혹했던 유년기를 딛고 '불평등·불합리·불공정'을 바로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정치를 시작한 그는 여전히 같은 이유로 대통령 후보에 나섰다. 그는 "대립과 갈등이 심한 근본 원인은 경제력 불균형 때문이다. 사회 전체의 부는 늘었지만 너무 많이 한곳에 집중돼 있다. 갈등은 그 쏠림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일찌감치 경선 캠프를 꾸리고 '준비된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부각해 지난 4월27일, 90%에 육박하는 지지율로 다시 한 번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이 당선인은 선거 내내 '원팀'을 강조했다. 2021년 대선 경선에서 벌어진 '내전'을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다. 당시 이 당선인과 이낙연 전 대표는 경선 과정에서의 갈등을 끝내 봉합하지 못하며 결국 대선에서 석패를 겪어야 했다. 3년 전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이번 경선 이후 이 당선인은 김경수 의원 등 경쟁 후보 측 인사를 선대위에 적극 포섭했다.
그의 정치 인생은 스스로 길을 내는 고독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타협보다 정면 돌파를 택하는 일이 잦았고 그만큼 진영에 따라 이 당선인을 보는 시선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2025년 6월3일, '인간 이재명'이 마침내 제21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 당선인은 내란을 극복한 토대 위에서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 세대와 계층으로 갈라진 대한민국을 하나로 묶는 '통합의 시대'를 열겠다는 약속이다. 그는 이 시대를 열어가는 과정에서 "편 가르기도, 정치 보복도 없다"고 강조한다. 보수 진영은 물론 주류 사회의 시선은 아직도 매섭다. 비주류의 아픔을 잊지 않되 주류를 설득해 나가는 일. 지금 이재명 당선인 앞에 놓인 큰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