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주병기 교수가 공정거래위원장에 내정 돼 그에 대해 조명하는 기사를 쓰고 있을 무렵이었다. 대기업 임원들이 기사를 보고 직접 이렇게 물어왔다. 당시 이재명 대통령이 그를 지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통가는 말 그대로 '초긴장' 상태였다. 평생 불평등과 경제 정의를 연구해 온 학자가 수장이 된다니, 기업들은 "우린 이제 큰일났다"는 분위기였다. 이는 마치 2021년 '아마존 저승사자' 리나 칸이 미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으로 임명됐을 때,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전례 없는 '기피 신청'을 내며 두려워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취임 3개월이 지난 현재, 업계는 "생각보다 조용하다"는 안도 섞인 반응이다. 시장의 심판자가 피감 기관에 공포가 아닌 '안도감'을 주고 있다니, 어불성설(語不成說)이자 이율배반(二律背反)이다. 학계에서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논리가 정책 집행으로 이어지길 기대했던 이들은 쿠팡 사태와 관련해 "의례적인 압수수색정도로는 부족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 사이 국세청이 먼저 칼을 빼들었다. 국세청은 지난 22일 쿠팡의 물류 자회사 쿠팡풀필먼트서비스(CFS)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국외 거래 담당 조직까지 투입해 미국 본사와의 자금 흐름을 정조준했다는 것은, 과세 당국이 이번 문제를 구조적 차원에서 보고 있다는 의미다.
지금 언론과 국회는 김범석 의장의 오만함과 비도덕성을 질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 논란으로 촉발된 불길은 이제 거대 플랫폼의 독점 폐해와 창업주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으로 옮겨붙었다. 혁신의 이면에 가려진 독점의 민낯이 드러나는 지금, 공정위의 역할론이 부각되고 있다.
공정위가 봐야 할 본질은 '태도'가 아니라 '구조'다. 거대 플랫폼이 시장 장악력을 바탕으로 유통 생태계의 숨은 주역들을 어떻게 약탈하고 있는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쿠팡은 '최저가'와 '무조건 반품' 정책으로 소비자에게 찬사를 받지만, 그 뒤에는 손실을 보전하기 위한 막대한 차액과 반품 비용을 떠안아야 하는 입점 업체들의 피눈물이 있다. '영광은 플랫폼이, 비용은 소상공인이' 감당하는 이 기형적 구조는 리나 칸이 겨누던 아마존의 비즈니스 모델과 판박이다.
이제 플랫폼 생태계는 '최저가'라는 미명의 소비자 후생만 보는 평면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음하는 중소상공인과 비정규 노동자까지 아우르는 '항공뷰'로 조망해야 모순이 보인다. 리나 칸이 제창한 '아마존 독점의 역설'의 핵심인 이 주장은, 주 위원장 역시 교수 시절 수차례 강조했던 내용이기도 하다. 그는 학자 시절 "독점 플랫폼이 단기 저가 정책으로 시장을 장악한 뒤 공급망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리나 칸은 정권 교체라는 정치적 파도에 막혀 임기 절반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반면 이재명 정부 출범과 함께 임명된 주 위원장에겐 5년이라는 충분한 임기와 강력한 개혁 동력이 쥐어져 있다. 그에게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공직자로 국민 앞에 선 지금, 좌고우면하는 학자적 신중함을 버리고 과감히 쿠팡의 불공정 사슬을 끊어내는 한국의 리나 칸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