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허은선의 개인전 '그림자는 춤을 추고 싶다'가 갤러리 '10의 n승'에서 이달 31일까지 관객들의 발걸음을 기다린다.
허은선은 몸을 하나의 언어로 삼아 삶의 감정과 기억을 탐구해온 작가다. 그의 작업은 고요하지만 밀도 있는 시간의 층위를 담아내며 '살아 있는 몸'의 감각과 존재의 의미를 깊이 파고든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솜, 천, 촛농, 물결 등 익숙한 재료들이 낯설게 다가온다. 이 재료들은 작가의 삶을 견디게 한 시간의 파편들이자, 치유가 아닌 반응으로서의 취약성을 담고 있다. 허은선에게 취약성은 약점이 아니다. 삶의 압력 속에서 스스로를 가능하게 만드는 힘, 그 힘이 몸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은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가는 작가의 기록이다. 썰물 때 길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며, 아직 보이지 않는 길을 믿고 묵묵히 나아가는 몸. 이 퍼포먼스는 작가가 삶을 대하는 태도 그 자체를 보여준다. 고통과 마주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의지. 이는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다.
다른 한편에는 피부 위에 촛농을 굳혀 떼어낸 흔적이 놓여 있다. 차갑게 굳은 조각은 뜨거운 순간의 흔적을 담고 있다. 욕망과 고통이 뒤섞인 인간의 취약한 모습을 담담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정신적 고통이 신체에 남긴 변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드로잉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전시는 결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박스 안에서 싹을 틔운 고구마를 발견하고 이를 돌보는 사진은 의외의 유머와 따뜻함을 선사한다. 느슨하게 피어난 생명은 고통과 생존이 반드시 무겁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허은선의 작업은 말보다 오래 남는 몸짓이다. 이번 전시는 그 몸짓들이 모여 하나의 서사를 이루는 자리다. 취약함을 숨기지 않고, 그 위에 기꺼이 춤을 세운 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 여름의 끝자락에서 존재의 의미를 묻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