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2월25일 서울 중구 충무로 소재 22층 규모 대연각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해 163명이 숨졌다. 이 화재는 우리나라 최악의 화재 사건 중 하나로 당시 세계 최대 규모 호텔 화재 사고로 기록됐다.
불은 가장 취약한 지점에서 시작됐다
불은 오전 9시50분쯤 호텔 1층 커피숍에서 발생했다. 당시 사용 중이던 프로판(LPG) 가스 폭발이 원인이었다. 폭발 직후 불꽃은 인근 가스레인지로 옮겨붙었고 카펫과 목재 중심의 내부 인테리어를 타고 삽시간에 확산했다.지상 22층 규모 고층 호텔은 불과 한 시간 남짓 만에 거대한 굴뚝으로 변했다. 불길은 계단과 복도를 차단했고 고층 투숙객들은 사실상 퇴로를 잃었다. 당시 호텔 내부에는 스프링클러가 없었고 화재 경보 설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비상 탈출용 밧줄이나 체계적인 피난 유도 장치 역시 없었다.
서울 시내 모든 소방력이 동원됐지만 기술적 한계가 명확했다. 고가 사다리차는 겨우 8층 높이까지만 접근할 수 있었고 고층 구조에 특화된 장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군 헬기와 미8군 헬기, 대통령 전용 헬기까지 투입됐지만 고열과 유독가스로 구조가 쉽지 않았다. 헬기들은 건물 주변을 선회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불구경'이 된 재난
고층에 고립된 일부 투숙객들은 침대 매트리스나 담요를 붙잡고 뛰어내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연기에 질식하거나 불길에 휩싸였다. 불은 발화 약 10시간 만에 완전히 진압됐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이 화재로 163명이 숨지고 63명이 부상했다. 사망자 가운데에는 질식사와 추락사가 다수였다. 당시 호텔에는 성탄절을 맞아 222개 객실에 내·외국인 투숙객이 머물고 있었다.피해액은 8억5000만원으로 추산됐다. 사고 당시인 1971년 기준으로도 막대한 액수로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그 규모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이날 화재 현장 주변에는 수만명의 시민이 몰려들었다. 일부는 택시를 타고 현장을 찾았다. 구조보다 구경이 앞선 장면은 당시 사회의 재난 인식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연기 속에서 질식 직전의 투숙객이 매트리스를 들고 투신하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은 이후 보도사진상을 받으며 참사의 상징으로 남았다.
참사 이후, 뒤늦은 제도 정비
대연각호텔 화재는 대한민국의 화재 안전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이 사고를 계기로 대형 건축물에 대한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화, 화재 경보 설비 전면 점검, 고층 건물 옥상 헬리패드 확보 등이 제도적으로 강화됐다.특히 '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화재 피해 보상과 보험 가입이 법적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그러나 이 역시 참사 이후에야 마련된 장치였다.
불에 탄 대연각호텔은 이후 보수 공사를 거쳐 '고려대연각타워'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건물은 형태를 바꿔 살아남았지만, 그날의 연기와 비명은 한국 사회의 기억 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