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성장해 고용을 늘릴수록 혜택은 끊기고 규제와 조세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한국 특유의 '성장 페널티'가 국내 경제 성장 잠재력을 저해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한상공회의소 SGI(지속성장이니셔티브)는 20일 발표한'한국 경제의 저성장 원인 진단과 기업생태계 혁신 방안'보고서에서 "국내 기업들이 50인, 300인 등 규제 장벽 앞에서 인위적으로 성장을 멈추거나 기업을 쪼개는 등 규제 회피를 위한'안주 전략'을 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SGI는 이러한 안주 전략이 국가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저성장을 가져오는 핵심 원인이라고 밝혔다. 보고서는 "기업들이 성장을 멈추면 생산성이 높은 대기업의 채용 여력은 줄어드는 반면 상대적으로 생산성이 낮은 소기업에 인력이 몰리면서 경제 전체의 효율성이 하락한다"며 "여기에 노동시장의 경직성까지 더해져 실업이 늘거나 비효율적인 부문에 한 번 배치된 인력이 고착화돼 국가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분석했다.
SGI가 구조적 모형을 활용해 기업규모별 차등 규제로 인한 경제적 영향을 분석한 결과 기업생태계의 왜곡으로 발생하는 GDP 손실은 약 4.8%(2025년 기준 111조원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신년대담에서 "한국 성장률은 5년마다 약 1.2% 포인트씩 하락해왔고 현재 잠재성장률은 약 1.9% 수준까지 낮아졌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번 SGI 분석은 기업 규모별 차등 규제만 걷어내도 최근 3년 치 경제성장분(2022~2025년 GDP 누적 증가액 약 103조 원) 이상을 단숨에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김천구 연구위원은 "기업 규모에 따른 차별적 규제가 기업의 손발을 묶는 족쇄라면 경직된 노동시장은 그 충격을 완충하지 못하고 경제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증폭기 역할을 하고 있다"며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와 한번 고용하면 조정이 어려운 노동 경직성이 결합돼 우리 경제가 감당하기 힘든 청구서로 돌아온 셈과 같다"고 분석했다.
SGI는 기업 규모별 차등 규제가 우리 경제의 신진대사인'진입-성장-퇴출'의 선순환을 막고 기업생태계를 영세 소기업 중심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소기업이 5년 뒤에도 여전히 영세한 규모(10~49인)에 머무는 비율은 최근 60%에 육박했다. 이는 1990년대(40%대) 대비 급격히 상승한 수치로, 기업들이 성장을 도모하기보다는 규제 회피 등을 위해 현재 상태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졌음을 시사한다.
경쟁력을 잃은 기업조차 시장에서 나가지 않는 퇴출의 병목 현상도 심각하다. 보고서는 "과거 60%에 달했던 퇴출률이 최근 40% 밑으로 떨어졌다"며 "이는 좀비 기업들이 한정된 인력과 자본을 붙잡고 있어 혁신 기업으로 흘러가야 할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가로막는 자원 배분의 동맥경화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SGI는 이러한 규제 역설이 한국 기업생태계를 선진국과 정반대인 기형적 구조로 변질시켰다고 주장했다. 생산성이 높은 대기업과 중견기업 위주로 고용을 창출하는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영세 소기업에 인력이 과도하게 쏠리면서 국가 경제 전체를 저생산성 늪으로 빠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기업생태계는 대기업과 소기업 간의 생산성 격차가 극심하다. 소기업의 노동생산성은 대기업의 30.4% 수준에 불과해 OECD 국가 중 격차가 가장 컸다.
SGI는 기업생태계의 역동성을 회복하고 저생산성 늪에서 탈출하기 위해 ▲업 오어 아웃 지원 체계 구축 ▲투자 중심 자금 조달 생태계 육성 ▲성장유인형 지원 제도 도입 등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정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정부가 기업 성장을 저해하는 구조적 문제를 인식하고 대책을 내놓은 것은 긍정적이나 관건은 현장에서의 속도감 있는 이행"이라며 "규제와 조세 제도의 과감한 재설계를 통해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유인체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