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낸드(NAND)의 등장으로 MP3, PMP, 스마트폰, 태블릿 등 다양한 제품군의 신규수요가 창출됐고 가전제품, 자동차, 카메라 등 전통적인 제품의 디지털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반도체 수요는 훨씬 다양해졌다. 이로 인해 과거의 수요 주기성이 사라지고 해마다 높은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따라서 기업의 PC 수요는 더 이상 반도체경기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생산자들의 증설 및 공정미세화로 인한 공급과잉 여부가 반도체산업의 호황과 불황을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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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K하이닉스반도체생산라인(사진=사진제공 SK하이닉스) |
◆반도체경기 시장성장률·설비투자율의 함수
여기서 우리는 반도체산업의 사이클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느 시점, 예컨대 호황기에 기업들이 풍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기업들은 더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설비투자를 할 것이고 그 결과 신규설비의 양산시점이 되면 공급과잉 상태가 된다.
공급과잉이 발생하면 반도체 가격은 하락하고 기업 실적은 악화된다. 불황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때 투자여력이 없는 기업들은 설비투자를 축소하게 되며 일정시간이 경과하면 공급부족 현상이 발생한다. 이때 반도체 가격은 다시 상승하며 호황기에 재진입하게 된다.
따라서 특정 연도의 설비투자증가율이 반도체 시장성장률보다 높게 되면 신규시설 양산시점인 약 1년 후에는 공급과잉이 발생해 불황이 시작된다. 반대로 설비투자증가율이 시장성장률보다 낮으면 약 1년 후 공급부족으로 호황이 시작된다.
이러한 사이클 특성은 비단 반도체뿐 아니라 대부분의 IT산업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또한 필자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 추이를 통해 이 모델의 유효성을 확인한 바 있다.
◆반도체 호황 내년에도 지속
2013년 설비투자 증가율은 반도체 시장성장률보다 낮았다. 따라서 2014년 반도체시장은 호황이 예상된다. 이미 2013년 호황이 시작됐기 때문에 2년 연속 호황이 지속되는 셈이며 혹자는 2015년까지 호황이 이어지리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호황이 길어지는 배경으로는 지난 2년간 설비투자가 부진했던 영향도 크지만 2012년 엘피다의 파산 이후 디램(DRAM) 시장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3사로 재편되며 치킨게임이 일단락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상위업체들의 독과점이 심화되면 공급조절 능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번 호황기를 디램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몇 년간 낸드(NAND) 수요는 크게 증가한 반면 디램 수요는 정체가 지속돼 대부분의 업체들이 낸드 위주로 투자를 확대했다. 디램 설비는 일부 축소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디램시장은 극심한 공급부족에 시달리게 됐으며 칩 가격이 급등했다.
이에 따라 비메모리, 낸드, 디램, 파운드리 등 포트폴리오가 고르게 분산된 삼성전자보다는 디램 생산비중이 70%가 넘는 SK하이닉스가 더 큰 수혜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008~2009년 불황기 때 SK하이닉스가 고전했던 원인이 디램 의존도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란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이미 2013년에 메모리반도체는 수출 1위 자리를 탈환했으며 새해에도 선전이 예상되고 있다. IT산업의 맏형이자 꽃이라 할 수 있는 반도체산업의 회복은 가히 '왕의 귀환'에 비견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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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덫에 걸린 디스플레이, 돌파구가 없다
반도체와 더불어 IT산업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디스플레이산업은 여전히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현재 디스플레이시장의 주력인 LCD의 경우 2009년 중국 정부의 LCD 국산화 선언 이후 시장 기능이 무력화된 상황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불황기에 진입하면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고 공급을 축소해야 가격상승 및 호황기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약 18조원의 보조금을 풀어 중국업체들이 적자상태에서 투자를 확대함에 따라 경기 사이클이 완전히 무너졌으며 시장예측이 불가능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중국정부는 LCD패널에 대한 관세를 3%에서 5%로 인상했으며 향후 8%까지 확대할 방침이어서 국내 디스플레이업체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 그나마 삼성디스플레이의 쑤저우 공장이 준공됐고 LG디스플레이의 광저우 공장도 곧 준공을 앞두고 있어 이제 겨우 중국시장 공략의 단초를 마련한 셈이다.
다만 TV시장이 포화상태에 근접해 연간 성장률이 10% 미만에 그치고 있어 과거 30~90%씩 성장하던 시대의 영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비록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소형제품의 판매가 아직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이들은 기기당 차지하는 패널 면적이 작아 패널 생산량을 모두 소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디스플레이업체들은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로 OLED TV 카드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OLED TV가 LCD TV의 아성을 넘기에는 아직 넘어야할 산이 많다. 수명과 화질 등 기술적인 문제도 남아있지만 더 큰 문제는 가격이다. OLED TV 가격이 조금씩 낮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LCD TV의 4~5배에 달해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기 어렵다.
OLED TV시장이 본격적으로 개화하려면 최소한 현재 가격의 1/3 수준까지 낮아져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가격을 낮추려면 생산이 증가해야 하는데 높은 가격으로 수요가 부진해 생산을 확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결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리 모순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OLED TV 확대의 또 다른 걸림돌은 OLED패널 생산자와 LCD패널 생산자가 대부분 중복된다는 점이다. OLED 시설에 투자를 집중하게 되면 LCD부문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주요 매출원인 LCD부문을 포기하면서 OLED를 확대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이것이 디스플레이업체들이 직면한 딜레마다.
이제 디스플레이업체들은 솔로몬의 선택을 해야 한다. 과감히 LCD부문을 축소하면서 당분간 역마진이 나더라도 낮은 가격에 OLED TV를 공급하든지 TV를 대체할 새로운 LCD 수요처를 발굴해야 한다. 우리 기업들이 뚜렷한 방향 없이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받는 중국 업체들이 턱밑까지 따라올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1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