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남산에 오르기 전 들러야 할 곳은 조선 인조 때 창건한 사정(射亭)인 ‘석호정’(石虎亭)이다. 원래 장충단공원 뒤쪽 산기슭에 있던 ‘활터’로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0년대 현 위치에 새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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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정.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
석호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석호’라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초나라에 웅거자(雄渠子)라는 용사가 있었는데 어두운 밤길에 호랑이를 만나 화살을 쐈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날 발견한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였다. 이 고사는 굳은 결의로 정진한다면 어떤 목표든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조선시대 활쏘기는 무인과 문인들에겐 반드시 익혀야 하는 필수 무예면서 신분을 가리지 않는 대중적인 놀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도성 안 산기슭 곳곳에 활 쏘는 정자, 즉 사정이 있었다. 석호정은 명맥이나마 유지하는 서울의 사정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상처 속 박문사와 수표교
1932년에는 장충단공원 동쪽 현 신라호텔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념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라는 사당을 세웠다. 사찰이 자리 잡은 언덕은 이토 히로부미의 호를 따서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명명했다. 한일합병의 주범을 추모하는 사찰의 정문은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의 목재를 뜯어다 지었고 그 부속건물은 경복궁 궁궐의 목재를 썼다니 민족의 서글픔이 사무치는 역사적 공간이다.
해방 후에는 관광공사에서 운영한 영빈관의 정문으로 이름만 바꿔 그대로 사용했다. 그 후 1979년 3월 준공한 신라호텔에 영빈관을 매각했는데 영빈관 정문을 호텔 정문으로 사용했다. 지금은 모조품이다.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을 계기로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을 현재의 흥화문으로 옮겼기 때문. 호텔로 올라가는 돌계단도 예전 박문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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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교.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
그리고 장충단공원의 수표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다. 세종 2년(1420년) 개천(開川: 청계천 2가)에 세웠고 당시 인근에 우마를 매매하는 시장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 불렀다. 세종 23년(1441년)에는 수심을 재기 위한 수표(水標)를 세우고 수표교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엔 나무 수표였지만 후대에 돌로 개체됐다. 영조 36년(1760년) 개천을 준설할 때 다리 옆에 눈금을 새긴 수표를 다시 세웠고 교각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 글씨를 새겼다. 경진년에 하천 바닥을 평탄하게 정비했다는 뜻이다. 수표교에는 숙종과 장희빈의 첫 만남에 관한 일화도 전해진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시작하며 장충단공원으로 옮겼다. 당시 수표석(水標石, 보물 838호)도 함께 옮겼다가 지금은 세종대왕기념관에서 보존 중이다.
◆남소문에 얽힌 이야기
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호텔 뒷문으로 나와 왼쪽 오르막길가에 남소문 터의 표지석이 있다. 성곽이 끊겼다는 표지판의 계곡 아래쪽 장충단 길에서는 가장 높은 언덕 위에 남소문(南小門)이 있었다.
신당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언덕을 통틀어 버티고개로 불렀고 옛날 이름은 부어치(扶於峙)였다. 세월이 흘러 ‘부어’는 ‘버’가 되고 '언덕 치'(峙)는 언덕이라는 우리말 '티'로 변해 '버티'가 됐을 것이다. ‘부어’란 밝다는 뜻이므로 부어치는 밝은 고개, 햇빛이 잘 드는 고개란 뜻이다. 하지만 이름과는 달리 고갯길이 좁고 인적도 드물어 산적이 자주 출몰하는 음침한 곳이었다고 한다. 예종 1년(1469년) 8월25일 임금이 형조에 명해 이 고개의 도적을 잡아 징치하라는 기록을 보면 그때의 사정이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한양수비대나 선전관(임금을 호위하고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선전관청의 무관)이 공격당하는 등 불상사가 이어지자 9월14일 남소문에 대한 풍수지리설과 음양설이 논의됐다. 음양설 외에도 수레가 다닐 수 없을 만큼 도로 폭이 좁아 문을 열 실익이 없다는 등 여러 의견이 있어 폐문 논의를 제기한지 5일 만인 9월19일 남소문을 폐쇄했다. 추정컨대 세조 3년(1457년)에 건립된 남소문은 약 12년 만에 그 역할을 마쳤을 것이다.
이후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주장이 명종과 숙종 때 여러 차례 제기됐으나 또다시 음양설 등으로 인해 문을 열지 않았다. 이 문은 폐쇄된 상태로 조선 말까지 존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13년 일제가 도로를 개설하면서 철거했다고 한다. 이때 고개를 5m 정도 낮췄으므로 이 문의 주초마저 없어진 셈이다.
세조가 남소문을 건립한 이유는 조선 초기 남쪽지방에서 한강진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오려면 광희문을 지나 현재의 약수동 고개를 넘어야 해서다. 따라서 버티고개를 넘어 바로 도성에 닿도록 남소문을 세워 지름길로 활용한 것이다. 남소문은 강남과 도성의 동쪽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남소문이 있어서 지금의 장충동 일대를 예전에는 남소동이라고 했고 이곳에 남소영이라는 병영이 있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495호(2017년 7월5일~1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