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66년 9월1일 제2회 아시아국회의원연맹(APU) 서울총회 참석을 위해 일본 의원단 20명을 인솔하고 방한한 기시 전 일본 총리를 공화당 당의장실에서 면담했다.사진=운정재단/뉴스1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66년 9월1일 제2회 아시아국회의원연맹(APU) 서울총회 참석을 위해 일본 의원단 20명을 인솔하고 방한한 기시 전 일본 총리를 공화당 당의장실에서 면담했다.사진=운정재단/뉴스1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했다. 이로써 김 전 총리와김 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3김 시대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지만 이들이 남긴 말들을 보면 한국 현대 정치사가 보인다.
1970년대 40대였던 3김은 날선 대립전선에서 마주했다. 김 전 총리는 산업화를 내건 박정희 정권의 2인자로,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당을 하며 민주화 투쟁 선봉에 각각 서있었다.

“이 김영삼이가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바른 길, 정의에 입각한 일, 진리를 위한 길, 자유를 위하는 일이면 싸우렵니다. 싸우다 쓰러질 지언정 싸우렵니다.”(1969년6월21일 국회 신상발언)


1969년은 ‘3선개헌’으로 정국이 시끄러웠다. 2년여의 군정 기간을 끝내고 1963년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4년 연임제를 바꿔 3번째 대권 도전에 나선다. 이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인 신만당의 원내총무(현 원내대표)로 3선개헌 반대 선봉에 나섰다. 그는 1969년 6월13일 국회본회의 대정부 질문을 통해 3선 개헌의 부당성을 알리고 개헌작업 중단을 촉구했다. 그 후 일주일 뒤인 20일 밤 10시15분께 그가 탄 차량에 괴한 3명이 질산이 든 병을 던진다. 사건의 배후는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로 추정된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김 전 대통령은 국회 신상발언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끝까지 싸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그해 9월14일 국회에서 3선개헌안이 통과된다. 신민당 등 야당이 본회의장을 막고 투쟁하자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제3별관에서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킨다.


이에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은 40대 기수론 열풍이 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경선에서 후보를 중도 사퇴한 이철승 전 의원과 연대해 2차 투표까지 간 끝에 ‘라이벌’ 김영삼 전 대통령을 누르고 대선후보가 된다.
사진=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경선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김대중평화센터
사진=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경선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김대중평화센터

“여러분.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하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의 총통시대 (總縮時代)가 오는 것입니다.”(1971년 4월18일 장충단 공원 유세)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에 맞서 바람을 일으킨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공약이 큰 무기였다. 향토예비군 폐지, 미일중소 4개국에 의한 전쟁억제 보장 요구, 노사공동위 설치 등이다.

1971년 5월 대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95만표 차로 힘겹게 승리한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의 예언처럼 박정희 정권은 총통시대를 연다. 1972년 10월 유신을 통해 직선제는 폐지되고 대통령에 권한이 집중된 ‘체육관 선거’로 박 전 대통령은 18년간 장기집권의 초석을 다진다.

유신시대부터 1987년까지 전두환 군부정권시절 3김은 질곡의 삶을 이어간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0년 (국가)내란음모 및 국가보안법·반공법·계엄법·외환관리법 위반 등으로 계엄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는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2년 뒤 미국으로 떠나야만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가택연금 생활을 이어가며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을 벌이는 등 고달픈 민주화투쟁을 이어간다. 김 전 총리도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재산을 헌납하고 정계에 나설 수 없었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면서 3김은 오랜만에 정계로 복귀한다. 여기서 김 전 총리는 노태우 정부 이후 김영삼 문민정부와 김대중 국민의 정부 출범에 ‘2인자’로 동행한다.

“역사는 기승전결로 이뤄진다. 5·16은 역사 발전의 토양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사를 일으킨 사람이며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그 계승자이고, 김영삼 대통령의 변화와 개혁은 그 전환에 해당된다.”(1993.5.16. 5·16 민족상 시상식)

“대통령중심제 하에서 총리의 위치라는 게, 아무리 공동정권이라지만 ‘델리키트’하다.”(1998.10.25. 출입기자 간담회)

김 전 총리는 김영삼 정부에선 여당 대표로, 김대중 정부에선 ‘실세’ 국무총리를 맡는다. 그는 정치판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자신의 심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그가 남긴 말처럼 공동정권의 한 축이었지만 정치계의 1인자는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