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진조약 체결식. (출처: Uknown nclear, 1860,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858년 6월 13일, 중국 톈진(天津)에서는 청나라와 서구 열강들 사이에 일련의 불평등 조약인 톈진 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은 제2차 아편 전쟁(애로호 전쟁)의 결과로, 중국이 서구 열강의 압력에 굴복하여 문호를 더욱 개방하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1856년 발발한 제2차 아편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까지 진격하며 큰 압박을 가한 결과였다. 애초 아편 무역과 관련된 갈등에서 시작됐지만, 서구 열강은 더 많은 통상 특권과 외교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했다. 전쟁의 패배로 인해 청나라는 강제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됐고, 결국 굴욕적인 내용의 톈진 조약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톈진 조약은 크게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네 나라와 각각 체결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조약으로 상하이, 닝보, 푸저우, 샤먼, 광저우 등 기존의 개항장에 더해 톈진, 뉴창(영구), 등저우(옌타이), 타이완(타이난), 충칭(중경) 등 추가 개방됐다.

외국 상인들이 중국 내륙에서도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내지 통상권이 부여됐다. 이는 중국 경제에 대한 서구 열강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국 내에서 죄를 범한 외국인에 대해 중국 법이 아닌 해당 국가의 영사가 재판하는 영사 재판권(치외법권)도 인정됐다.

조약에 서명한 국가 중 한 국가가 청나라로부터 새로운 특혜를 얻게 되면, 다른 모든 국가도 동일한 특혜를 자동으로 부여받는 최혜국 대우 조항이 포함됐다.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이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에 상주할 수 있도록 허용됐다. 기독교 포교의 자유도 합법화됐다.


톈진 조약은 청나라가 서구 열강의 압력에 굴복하여 불평등한 국제 질서에 편입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조약은 훗날 중국 근대화의 길을 걷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인들에게는 '100년간의 굴욕'으로 기억되는 아픈 역사의 시작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