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조약 협성을 풍자한 삽화 (출처: Christina, 1919,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19년 6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을 공식적으로 끝내는 베르사유 조약이 파리 외곽 베르사유 궁전에서 체결됐다. 이 역사적인 조약은 4년간의 전례 없는 파괴와 인명 손실을 겪은 후, 연합국과 독일 제국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막대한 영토적, 경제적, 군사적 제약을 부과해 전쟁의 모든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었다. 조약은 독일이 연합국에 상당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독일 경제에 심각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고, 벨기에,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에 영토를 할양했다. 또한 모든 해외 식민지를 포기해야 했다. 독일군의 규모는 10만 명으로 제한됐고, 징병제는 폐지됐다. 잠수함과 공군 보유는 금지됐으며, 해군 함대의 규모도 크게 축소됐다. 라인란트 지역은 비무장 지대로 선포됐다. 독일에 부과된 총 배상금은 당시 천문학적인 액수인 1320억 마르크로 책정됐다.

조약 체결식에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 등 주요 연합국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독일 대표단은 조약 내용에 대한 불만을 표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엇갈린 반응을 불러왔다. 일부에서는 독일에 대한 정당한 처벌이자 미래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로 봤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조약의 가혹한 조건이 독일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심어주어 장기적으로는 평화보다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독일에 대한 가혹한 배상금과 군사적 제약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부상에 기여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그 자체로 새로운 갈등과 긴장의 씨앗을 뿌리며 20세기 중반의 역사적 흐름을 형성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