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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최근 시효이익 포기 추정에 관한 종전 판례를 58년 만에 변경했다(대법원 2023다240299 판결). 이번 판례 변경은 소멸시효 제도와 관련해 채무자와 채권자 간의 법률관계, 특히 채무 변제 및 추심 실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민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오랜 법적 명제에 근거해 소멸시효 제도를 명문화하고 있다. 소멸시효란 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동안 이를 행사하지 않으면 그 권리를 소멸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민사채권의 경우, 채권자가 10년 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소멸시효가 완성되며 채무자는 그 시효완성의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종전 판례(대법원 1967.2.7. 선고 66다2173 판결)는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채무를 승인한 경우, 시효완성의 사실을 알고 그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법리를 오랫동안 고수해왔다.
즉, 채무자가 소멸시효가 완성된 뒤에도 시효완성의 이익을 주장하지 않고 채무를 일부라도 변제했다면 이는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돼 채무 전액을 채권자에게 변제해야하는 의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법률적 의미에서 '추정'이란, 법률상 '그러한 사실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증명책임을 전환시키는 강력한 법적 효과가 있다. 따라서 채무자가 시효완성 후 일부 변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채무자는 시효이익 포기 의사가 있었다고 추정되기 때문에 채무자는 스스로 시효완성 사실을 몰랐거나 포기 의사가 없었음을 적극적으로 입증해야만 추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국, 결국 채무자가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보는 종전 판례의 추정 법리는 채무자의 방어권 행사를 크게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해왔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58년만에 시효이익 포기를 추정하는 법리를 폐기하기에 이르렀다.
대법원이 시효이익 포기 추정 법리를 폐기한 주된 이유는 아래와 같다. 첫째, 경험칙상 시효완성 후 채무승인은 채무자가 시효완성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이다. 보통의 채무자라면 자신에게 유리한 시효완성의 법적 이익을 스스로 포기하고 불리한 법적 지위를 자청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둘째, 채무승인과 시효이익 포기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개념이다. 소멸시효 중단사유 중 하나인 채무승인은 소멸시효가 완성되기 전에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상대방의 권리 또는 자신의 채무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는 뜻을 표시함으로써 성립한다.
반면, 시효이익 포기는 소멸시효가 완성된 이후 채무자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한 법적 이익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전 판례는 이러한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채무승인 행위가 있으면 곧바로 시효이익 포기의 의사표시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구조를 취하기 때문에 부당하다.
셋째, 추정 법리는 소멸시효 완성 후 채무승인이라는 행위만으로 채무자에게 중대한 불이익을 초래하는 시효이익 포기 의사를 지나치게 쉽게 추정한다는 점이다. 이는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는 의사표시에 대해 엄격하고 신중한 해석을 요구하는 대법원의 일반적인 원칙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넷째, 추정 법리는 채무자를 본래 법이 예정하지 않았던 불리한 지위에 놓이게 할 뿐 아니라, 대부업체나 추심업체 등이 시효 완성 후 채무자에게 일부 변제 등 채무승인 행위를 압박하거나 유도함으로써 시효이익을 포기하게 하는 데 악용되는 등 정책적으로도 부당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이다.
이번 대법원 판례의 변경으로 앞으로는 채무자가 소멸시효 완성된 이후 채무의 일부를 변제하더라도 일률적으로 시효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추정되지 않는다.
앞으로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시효이익 포기사실에 대한 입증 책임을 부담하게 되며, 이에 따라 소송 과정에서 사실관계의 입증과 증거 제출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전망이다. 특히 시효이익 포기 의사의 존재와 관련해 채무자가 일부 변제에 이르게 된 동기와 경위, 변제의 자발성, 당사자간의 관계 등이 주요 쟁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