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의 새로운 선장 찾기가 시작됐다. 월드컵처럼 돌아오는 익숙한 풍경이다. 이사회는 서둘러 후임자 물색에 돌입했다. 표면적 이유는 해킹 사태지만 근본적으론 정권 교체기마다 최고경영자(CEO)의 명운이 출렁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수순이다. 김영섭 대표가 해킹 사태에 대한 책임을 이유로 연임을 포기하면서 전임 대표 시절과 같은 혼란은 없지만 여전히 외풍에 휘둘릴 KT의 미래가 눈에 선하다.

KT는 민영화 이후 '정권과의 거리'에 예민했다. 엄연히 민영기업인 CEO 임기와 경영 권한이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실제론 달랐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정치권은 '우호적 인사'를 암암리에 요구하거나 이사회와 주요 주주의 의사결정에 신호를 보내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전문성과 역량보다 정권과의 코드 적합성이 생존의 핵심 요인이었다.


이 같은 구조에서는 장기 복안을 마음껏 구상하기 어렵다. 새로운 CEO가 수립한 전략이 정권 기류 변화에 따라 무력화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팽배하다. 신임 수장이 3~5년에 걸쳐 추진해야 하는 중장기 전략보다 당장의 정치적 신호를 관리하는 데 공력을 더 많이 들여야 한다. 수차례 성장 동력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김영섭 대표도 이러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임 구현모 대표가 힘을 쏟던 AI '믿음'을 이어받기보다 방향을 180도 틀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의 강력한 연대를 바탕으로 2조4000억원에 달하는 투자를 결정했다. 그 결과 정부 주도의 '국가대표 AI' 프로젝트에서 탈락하며 자존심을 구겼다. 이를 위해 한국형 AI를 추진하겠다며 '믿음2'를 급조하기도 했다. 변화하는 정치·산업 환경을 읽은 부분도 있겠지만 KT의 특수한 환경이 주효했다는 시각도 많다.

다소 성급했던 MS와의 협력 확대는 김 대표에게 부메랑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레임덕에 빠진 김 대표에게 사업 추진은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안정적인 퇴임을 위해 해당 사업을 수습하는 데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AI 경쟁이 하루가 다르게 격화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혼란은 치명적이다. KT는 'AI 3강 시대의 주역'이 되고자 하지만 실상은 CEO 불안정성과 정치적 간섭을 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는 장기 전략을 일관되게 추진하며 경쟁하는데 재계 12위이자 매출 26조원의 기간통신사업자 KT는 CEO 교체로 전략과 조직 구조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 되풀이됐다.

KT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또 한 번의 경영진 교체가 아니라 안정적이고 성숙한 거버넌스 체계다.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CEO 권한 보장, 정치적 간섭을 최소화하는 이사회 구조, 전문성 중심의 경영 승계 원칙이 마련돼야 한다. KT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공기업·준공공기업이 오랫동안 견뎌온 고질적 병폐이기도 하다.

차기 대표에게 요구되는 자질 역시 분명하다. 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독립성이 필요하고 AI·네트워크·디지털 인프라 등 KT의 핵심 사업 구조를 깊이 이해하고 장기적 비전을 세울 수 있는 기술 기반의 리더십이 요구된다. 전략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시장 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과거 통신이 주업이었던 시절과 다른 획기적인 변화가 절실하다.

정치권 역시 반성해야 한다. KT의 대표 선임 과정에 공식적·비공식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관행에서 손을 떼지 않는 한 공기업·민간 기업 어디에서도 혁신은 기대할 수 없다. KT를 정권 친화 인사 교체의 장으로 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필요하다면 CEO 임기 보장 및 독립성을 강화하는 법·제도 정비도 검토해야 한다.

한국 AI 산업의 경쟁력, 디지털 인프라의 안정성, 국가통신산업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분기점이다. 더 이상 이해관계에 흔들릴 시간을 허비할 여유도 없다. 이번 대표 선임 과정이 KT의 오랜 고질병을 반복할지 아니면 환골탈태의 계기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양진원 산업1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