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위의 경제 대국, 독일을 지탱하는 것은 수백년을 버텨온 '미텔슈탄트'(강소기업)의 뿌리인 재단 중심 기업 지배구조다. 이 제도는 나치 치하 오욕의 역사에 대한 독일인들의 처절한 반성의 결실이다. 독일은 '소유권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가치 아래 의결권과 배당권을 분리한 이원재단 제도를 안착시켜 부를 넘어 가치의 대물림을 실현했다.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휴고보스 등 독일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은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과 전쟁포로를 강제 동원해 군수품을 제조하는 등 피 묻은 성장을 이뤘다. 나치 체제 붕괴 이후 독일 사회에선 국가 권력과 자본의 결합으로 초래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힘의 집중을 견제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러한 성찰은 1949년 제정된 독일 기본법(헌법)에 소유권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대원칙으로 아로새겨졌다. 조병선 한국가족기업연구원장은 "현행 독일 기본법 제14조2항은 '소유권은 의무를 수반하며 그 행사는 동시에 공공복리에 기여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며 "사유재산권을 헌법적으로 보장하지만 그 사용에 있어서는 공익에 봉사해야 한다는 '사회적 구속'을 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핵심에 이원재단 제도가 있다. 이원재단 제도는 의결권을 행사하는 가족재단과 배당권을 취하는 공익재단을 이원화해 세제상의 혜택과 경영의 안정, 사회적 기여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독일의 대형 가구 유통업체 포코(POCO)를 운영했던 트리포스(Tripos)가 대표적인 사례다. 트리포스는 지분 99.5%를 공익재단인 피터 폴만 재단에 출연했다. 다만 경영과 관련된 공익재단의 의결권은 10% 수준으로 제한하고 지분 0.5%를 보유한 트리포스 가족재단이 전체 의결권의 90%를 행사하도록 구조를 설계했다.
의결권과 배당권을 분리한 이 구조를 통해 가족재단은 최소 지분으로도 장기적 경영에 전념할 수 있고 공익재단은 세제상 혜택을 누리는 동시에 배당금을 사회공헌 활동에 활용한다.
이원재단 제도는 독일 산업계의 보편적인 성공 방정식으로 자리 잡았다. 2023년 기준 독일 내 공익재단 수는 2만3199곳에 육박하고 있다. 350년 넘게 가족 경영을 이어온 세계적인 제약·화학 기업 머크부터 대표 미디어 그룹 베르텔스만, 광학 분야 글로벌 리더 칼 자이스 등 수많은 기업들이 수백년 동안 독일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조 원장은 "이원재단 제도의 핵심은 승계 시기마다 흔들리기 쉬운 지배구조를 고정해 기업의 연속성과 경영의 독립성을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모델은 반드시 물리적으로 두개의 재단을 두는 형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며 "복수의 재단을 운영하거나 재단과 신탁·파트너십 등 의결권 위임 기구를 조합해 각 기업에 최적화된 맞춤형 지배구조를 구현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재단에 대한 불신 거두고 중견기업부터 시범 도입해야"
이원재단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관련 논의가 진척되지 못한 배경에는 재단에 대한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하고 있다. 조 원장은 "한국에서는 재단이 기업 지배구조에 편입되는 순간, 이를 상속세 회피나 우회 승계, 경영권 방어를 위한 편법 수단으로 간주하는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공익재단이 고강도 규제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은 30여년 전 마련된 경직된 규제 틀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공익법인의 주식 면세 한도는 1994년 '5%'로 설정된 이후 지금까지 변화가 없다. 조 원장은 "이원재단 제도가 한국 사회에 안착하기 위해선 공익법인 관련 세제가 완화되는 등 제도 선진화가 시급하다"며 "재단의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지도·감독 체계를 혁신하는 등 제도 개선도 선행돼야 한다"고 했다.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제도 도입의 첫 단추를 대기업이 아닌 중견기업에서 찾아야 한다고도 제언했다. 조 원장은 "비상장 알짜 중견기업부터 제도를 적용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탄탄한 중견기업들이 재단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며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한국형 장수 모델'을 입증해낸다면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이 이원재단 제도를 도입할 최적기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그는 "보수 정권이 이 제도를 도입하려면 기득권이나 대기업을 대변한다는 비판과 거센 반대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고 짚으며 "분배를 강조하는 이재명 정부가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과 투명한 승계라는 명분을 앞세워 추진한다면 사회적 합의를 수월하게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