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를 보낸다. 칼날 위를 걸었다. 그 위태로운 날들을 버티고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특하다는 생각이다. 반성은 하겠지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한다.

개인은 그렇다 치자. 조직은 어떨까.
연말은 늘 변화를 강요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든, 더 멀리 가기 위해서든 "뭔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계절이다. 많은 조직이 선택하는 가장 빠른 길은 새 리더를 들이는 일이다.


하지만 그 길은, 대부분 기대를 비켜간다. 이번만은 다를까.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 조직의 구원자 찾기
위기 앞에서 조직은 영웅을 찾는다. 혁신을 외치며, 변화의 깃발을 흔들어줄 단 한 사람. 기업이든 협회든 정당이든, 사람만 모이면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2017년 겨울, 20여 년 동안 가을 야구조차 멀었던 LG 트윈스도 그랬다. 팬들은 '거물 루키', '(유)명감독'을 외쳤지만, 구단은 의외의 선택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밀려난, 타율 2할3푼1리를 찍었던 김현수에게 4년 115억원을 안긴 것이다.
김현수는 매일 같은 루틴으로 타석에 섰다. 지고 돌아오는 날에도 후배에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 이기면 되지."그리고 먼저, 묵묵히 연습했다. 밤 연습장의 불빛 아래, 배트 끝에서 울리던 규칙적인 타격음. 땀에 흠뻑 젖은 장갑이 흙 냄새와 섞이며 만들어내던 리듬. 그 소리가 팀을 조금씩 바꿨다. 모래알 같던 분위기가 벽돌이 되어 이어 붙기 시작했다. 오지환은 말했다. "김현수 앞에서 연습 많이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고.


그 선택은 2023년 29년 만의 통합 우승으로 돌아왔다. 2024년 잠시 흔들린 팀은 올해 다시 정상에 올랐다. 무적엘지, 챔피언. 서른일곱의 김현수는 코리안시리즈 MVP였다. (2026년 시즌을 앞두고 그는 KT로 옮겼다. 또 어떤 변화를 만들지 궁금해진다.)


■ '천재와 거장' 그리고 탈레브의 질문
데이비드 갤런슨은 '천재와 거장-위대한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에서 예술가를 두 부류로 나눴다.

-천재(Genius): 젊은 나이에 번뜩이는 영감으로 혁신을 낚아채는 사람, 피카소 같은 이들.
-거장(Master): 오랜 시행착오 끝에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하는 사람, 세잔 같은 이들.

피카소는 말했다. "나는 탐구하지 않는다. 발견한다."세잔은 말했다. "나는 그림을 통해 탐구한다."
발견자와 구도자. 빠르게 불타오르는 불꽃과, 오래 버티는 등불로 비유할 수 있겠다.

이 구분은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예측 불가능한 충격 앞에서 리더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천재형은 직관으로 파고들고, 거장형은 준비로 파괴력을 줄인다.

결국 리더십은 불확실성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된다. 충격을 견디는 힘을 넘어, 그 충격을 기회로 바꾸는 체질과 태도 말이다.

■ 두 리더십의 얼굴
― 천재형: 나폴레옹
1805년 아우스터리츠. 나폴레옹은 말을 멈추고 외쳤다."저기 적을 보라. 승리가 저기 있다."군대는 불길처럼 움직였다. 그의 직관은 불꽃이었다. 유럽은 그 불꽃에 휩싸였다.그러나 불꽃은 오래 타지 못한다. 러시아의 겨울이 그 증거다.

― 거장형: 이순신
이순신은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난중일기'에는 바람의 세기부터 병력 관리까지 빼놓지 않고 적혀 있다.열두 척의 기적은 한 번의 영감이 아니라 수천 번의 점검이 만든 결과였다.거장의 리더십은 화려하지 않지만, 폭풍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다.

― 현대 기업의 두 얼굴
일론 머스크는 천재형이다. 하나의 큰 생각으로 산업을 흔든다. 하지만 한 줄의 트윗으로도 흔들린다.제이미 다이먼은 거장형이다. 수십 번의 스트레스 테스트와 리스크 점검. 위기 때 오히려 존재감을 키운 이유다.

■ 문제는 리더가 아니라 리더십이다
조직이 새 리더를 들이며 혁신을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을 쉽게 놓친다. 그 리더가 펼칠 리더십은 지금 조직의 현실에 맞는가.

밤과 낮, 회의실과 현장에서 스스로 물어보라.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숨결 같은 거장인가, 불꽃 같은 천재인가. 혹은 그 둘을 오갈 수 있는 힘인가.
대답은 상황마다 달라질 것이다.

*추신: 한 가지만 분명하다. 천재와 거장은 무 자르듯 나누기 어렵다. 모든 영감은 결국 반복 위에서 완성되고, 모든 반복에는 작은 발화점이 필요하다. 백조의 우아한 유영도 물속의 쉼 없는 발짓 덕분이다. 절반은 실패지만, 남은 절반이 세상을 조금씩 앞으로 민다. 내 경험도 그 사실을 증명한다. 어쨌거나 미리, 해피 뉴 이어.
김영태 아케이드 프로젝트 대표



김영태
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