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버리는 성, 지키는 성

한양도성 해설기-2 /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

 
 
기사공유
  • 카카오톡 공유
  • 카카오톡 공유
  • 네이버 블로그
  • 카카오스토리
  • 텔레그램 공유
  • url 공유

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태조 이성계는 1395년 윤 9월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도성축조를 시작했다. 처음 한양도성을 쌓을 때는 5만9500척(약 18.627㎞)의 전 구간을 전국 97개 군현에서 차출된 19만7400명이 군현별로 약 600척씩 나눠 축조했다.

축조기간은 태조 5년(1396년) 음력 1월9일부터 2월28까지 49일간, 8월6일부터 9월24일까지 49일간 2회에 걸쳐 진행됐다. 농번기와 혹서기, 혹한기는 피하고 농한기에만 일했을 것이니 1년 중 3개월 남짓 공사에 동원된 셈이다.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은 대부분 축성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없었다. 게다가 산에는 도로가 없고 운반구도 변변치 않아 멀리서 성 쌓을 돌을 가져올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석이 흔한 백악산, 목멱산, 인왕산 등에서 수집한 돌로 성곽을 쌓았다.

낮은 산인 낙산구간은 자연석이 많지 않아 대부분 흙으로 쌓았다. 2000년 전에 쌓은 몽촌토성을 보면 알 수 있듯 토성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찬찬히 쌓으면 석성보다 더 견고한 성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태조 때 급하게 쌓은 토성은 홍수에 허물어져 심하게 훼손됐다.


낙산성곽. /사진=서대웅 기자
낙산성곽. /사진=서대웅 기자

◆세종 때의 개축

상왕이 된 태종은 세종 3년(1421년)에 한양수축도감(漢陽修築都監)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성곽 보수공사를 지휘·감독했다. 세종 4년(1422년) 1월15일부터 시작해 2월23일에 끝난 수축공사에는 약 32만2000명이 동원돼 도성의 전 구간을 석성으로 바꿨다. 이때 청계천 수문도 3칸에서 2칸을 더 늘려 ‘오간수문’이 됐다. 그러나 무리한 공사로 사망자가 872명에 달했다고 한다.

농업을 중시하던 조선시대 초기에 성을 쌓는다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토목공사였을 것이다. 무거운 돌을 운반할 장비라고는 수레밖에 없었고 그 많은 돌을 다듬을 연모도 없었다.


태조 때는 자연석을 주워 모아 초석으로 비교적 큰 화강암을 놓고 위로는 무질서하게 쌓았다. 그저 돌 위에 돌을 얹어놓았다고 하는 편이 적절한 표현이다. 또 무너짐을 막기 위해 기울기를 완만하게 쌓았다. 세종 때에 이르러서 훼손된 부분이 늘어난 배경이다.

따라서 세종 때의 축성은 가로로 길쭉한 장대석을 초석으로 깔고 위로 갈수록 작은 자연석을 정연하게 쌓아올렸다. 체성 윗부분의 궁굴린 작은 성돌은 조금 떨어져서 보면 마치 옥수수알맹이를 쌓아올린 것 같다. 성돌도 전반적으로 태조 때보다 더 커졌고 직사각형에 가까운 자연석을 사용했다.

◆숙종과 순조 때의 축성

세종 이후에도 부분적인 성곽보수가 이어졌다. 현종 때까지는 원래의 성돌 재료를 사용하거나 새로운 성돌을 사용해 기존 방식 그대로 성벽을 쌓았다.

마지막 대대적인 개축을 했던 숙종 때(1704년, 숙종 30년 수축 시작)는 태조 때나 세종 때와는 달리 오군영의 군인들이 일정구간을 나눠 도성의 보수공사를 담당했다. 오군영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과 경기 일원 등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을 말한다. 이 관행은 그 후로도 이어져 영조 때는 도성의 방위를 맡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 삼군문이 도성수축을 분담했다. (이때 총융청은 북한산성, 수어청은 남한산성의 방위를 맡았다.)

낙산성곽 축성 시기에 딸 돌 크기가 다르다. /사진=서대웅 기자
낙산성곽 축성 시기에 딸 돌 크기가 다르다. /사진=서대웅 기자

숙종 때는 개선된 장비와 석공기술의 발달로 요즘의 축성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정교한 모양을 보여준다. 한 변이 40~45㎝의 네모난 돌로 빈틈없이 짜맞추듯 성을 쌓았다. 이때의 축성기법은 조선말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등 궁중 여인들의 치마폭에 휘둘려 정사를 소홀히 한 왕으로 알려진 숙종은 단호한 카리스마의 명철한 왕이었다. 광해군 때 시작된 대동법이 이때 완전히 시행돼 농업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 전환됐고 상평통보라는 화폐경제가 정착됐다. 숙종 때는 대대적인 공공사업을 벌일 재력이 충분했다.

순조 때는 견고한 성곽 수축을 위해 성돌의 크기가 숙종 때보다 더 커졌다. 가로와 세로가 각각 60㎝ 정도인 정방형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성곽을 쌓았다.

돌이 커지면 쌓을 때 힘이 더 들 텐데도 큰 돌을 쓴 이유가 뭘까. 대포처럼 놀라운 파괴력을 자랑하는 신무기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무기에 대비하려면 튼튼한 성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

◆제 구실 못한 이유는

이렇게 수차례 수축을 거듭한 한양도성은 안타깝게도 방어시설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외침 때는 물론 내란 때도 도성을 지키지 못했다. 난이 일어날 때마다 왕과 지배층은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기 바빴다. 도성 안에는 장기전에 대비해 군량미를 조달할 농토가 없고 무기를 자체적으로 조달할 시설이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싸우려는 의지가 확고했다면 평소에 군량미를 비축하고 무기를 생산할 시설을 확보했을 것이다.

[한양도성] 버리는 성, 지키는 성
결국 뒤에 남아 고초를 당하는 것은 백성뿐이어서 “애써 성을 쌓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며 불평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영조는 1751년(영조 27년) 9월11일 “왕이 도성을 지키는 것은 백성을 위한 일이며 변란이 일어나면 내가 먼저 성 위에 올라 백성과 함께 싸우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른바 수성윤음(守城綸音)이다. 그와 더불어 도성민에게 각각 담당구역을 정해주고 유사시에 무기를 들고 맡은 구역을 지키게 했다. 도성민을 주체로 하는 도성방위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 0%
  • 0%
  • 코스피 : 2465.07상승 2.118:05 09/27
  • 코스닥 : 841.02상승 13.218:05 09/27
  • 원달러 : 1349.30상승 0.818:05 09/27
  • 두바이유 : 96.10하락 0.6518:05 09/27
  • 금 : 1866.10하락 12.518:05 09/27
  • [머니S포토] '고향 잘 다녀올게요'
  • [머니S포토] D-1 추석 연휴, 붐비는 승차권 현장 발매소
  • [머니S포토] 대한상의 찾은 방문규 "ESG·新기업가 정신 등 선제적 대응 감사 드려"
  • [머니S포토] SKT '자강·협력' 투 트랙, AI 피라미드 전략 추진
  • [머니S포토] '고향 잘 다녀올게요'

칼럼

커버스토리

정기구독신청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