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에는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다. ‘제주에 집 하나 지었으면…….’ 하는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는지, 멋진 작품으로 꿈을 이룬 사람들이 있다. 여유로운 공간과 하늘이 그 작품들을 더욱 빛나게 하는 곳, 제주 서귀포로 집 구경을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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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종미술관. |
◆김중업과 두채의 집
김중업은 대한민국 건축의 거장이다. 평양 출신인 그는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현 요코하마 국립대학)에서 건축 공부를 시작했다. 광복 후 1947년부터 서울대에서 강의하다가 1952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제1회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여기서 세계적인 건축 거장 르 꼬르뷔제를 만난다. 운명적인 만남으로 거장의 제자가 된 그는 1955년까지 4년간 르 꼬르뷔제 건축연구소에서 일했다.
고국에 돌아온 김중업은 건축연구소를 열고 여러 활동을 했다. 1962년에는 서울시 문화상, 1965년에는 프랑스 국가공로훈장도 받았지만 소란했던 시절이 예술가의 발목을 잡았다.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1971년 프랑스로 강제 출국을 당하고 8년 동안 유랑생활을 한다. ‘산업화’라는 미명 하에 논밭을 잘라 도로를 만들고 마을을 파헤쳐 도시를 만들기 바빴던 군사정권 시절의 일이다. 예술가로서의 건축가는 시대가 감당하기에 분에 넘치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해외를 떠돌며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다 1979년에야 귀국한 선생은 1988년 향년 66세로 타계할 때까지 건축가로서의 정열을 불태웠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은 1985년 설계한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이다. 선생은 전성기에 공백이 있었음에도 200여개의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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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중앙여중 서측. |
제주에도 선생의 작품이 있다. 1965년에 설계한 제주대학본관은 김중업의 대표작으로 손꼽히지만 해풍에 부식돼 철거됐다. 남은 작품은 구 제주대학 농과대학 수산학부 건물로 지금은 서귀중앙여자중학교로 쓰인다. 이 건물은 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달라 한쪽 면만 봐서는 다른 쪽을 예측할 수 없다. 특히 건물 서쪽이 독특하다. 직사광선이나 빗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창문에 덧댄 차광막이 눈길을 끈다. 생각해 보니 서울 서강대학교 본관과 비슷한 느낌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료를 찾아보니 이 또한 김중업 초기 작품이다. 서강대 건물도 서쪽 창에 차광막을 만들어 늦은 오후의 강한 빛을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
김중업 작품으로 추정되는 구 ‘소라의 성’은 곡선이 아름답다. 외관에서 보이는 2층의 돌출 부분과 여기서 아래로 떨어지는 필로티 구조, 내부의 끊어질 듯 이어진 곡선은 공간을 감싼다. 문은 없지만 곡선이 주는 아늑함과 개방됐음에도 안과 밖이 구분되는 공간은 오묘한 반전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이름처럼 커다란 소라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옥상에서 보는 풍경 또한 작품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진입로에서 보면 숲으로 둘러싸인 집 같지만 보이는 전망은 바다다. 1969년에 건축됐다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닌데 작자 미상이라는 점도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답고 로맨틱한 소설이 탄생할 것 같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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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의 성. |
◆왈종미술관과 기당미술관
‘소라의 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왈종미술관이 있다. 이곳은 한 화가의 꿈이 담긴 집이다. 이왈종 선생은 자신이 원하는 작업실의 모습을 도자기로 빚었다. 그리고 그 도자기가 그대로 건축물이 됐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건축가 한만원과 다비드 마클로다. 조선 백자를 닮은 미술관에 창을 많이 내어 조명 없이 작품 감상을 할 수 있게 했다. 1층에는 수장고와 도예실, 어린이 미술교실을 만들고 2층은 전시실, 3층에는 작가의 작업공간을 마련했다.
옥상정원에는 도예작품과 함께 작은 휴게실이 있다. 이곳에서 보이는 풍경 속에 ‘소라의 성’이 있다. 선생은 ‘소라의 성’ 주인이었던 고 김철호씨와 깊은 친분을 나눴다. 김씨는 선생이 이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줬고 자연스레 둘은 친구가 됐다. 1998년 김씨가 갑자기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자 선생은 1년 동안 친구의 사진을 방에 걸고 향을 피웠다고 한다. 이때 마음에 드는 향로를 찾지 못해 도자기 가마를 들이고 직접 만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많이 보이는 닭 모양의 작품들은 본인이 닭띠인 탓이며 향로는 친구를 기리는 것이다. 가끔 닭 모양의 향로도 보인다. 행복한 꿈이 느껴지는 왈종 선생의 작품에는 선생 자신이 들어 있다. 꿈으로 지은 집과 아름다운 우정의 이야기에서 순수한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기당미술관은 1987년에 개관해 올해 30주년이다. 서귀포 법환동 출신 재일교포 사업가 기당 강구범 선생이 건립했고 설계자는 김홍식이다. 왈종미술관도 둥글고 기당미술관도 동글동글 한데 모티브는 전혀 다르다. 기당미술관은 제주의 전통 농가에서 볼 수 있는 ‘눌’을 닮았다. ‘눌’은 농사를 짓고 난 후 마당 한쪽에 부산물을 둥글게 쌓아놓은 것이다.
외벽은 제주의 현무암으로 마감했고 실내로 들어서면 방사형으로 드러난 서까래가 인상적이다. 동선도 나선형의 기울기가 있어 편안하고 개방감이 있는 기획전시실에서 자연스럽게 작품 관람에 집중하기 좋은 상설 전시실로 이어진다.
‘폭풍의 화가’라는 별명을 가진 고 변시지 선생이 초대 명예 관장으로 미술관에 완만한 기울기가 생기게 한 인물이다. 설계자는 지반이 약한 이곳의 특성을 고려해 건물 자체의 하중을 최소화하는 한편 다리가 불편한 변시지 선생을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설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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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종미술관 옥상 야외전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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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당미술관. |
제주지역 첫 시립미술관이기도 한 기당미술관은 올해 30주년을 기념하여 아카이브전을 열고 있다. 고영우, 강용택, 김택화, 고영만, 고재만, 이학숙 등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기당미술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초기 명예관장실과 사무실의 서류 책장, 어린이 미술전 작품, 각종 자료와 홍보물, 방명록 등을 전시하며 제목은 <원조 30년: 최초의 시립미술관 찾기>다. 작품과 역사를 아우르는 빈티지한 톤앤매너가 관람객의 흥미를 끈다.
◆김정희가 설계하고 승효상이 지은 추사관
서귀포 대정읍은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다. 집 주변에 가시나무를 심어 위리안치된 김정희는 그 한을 꾹꾹 담아 추사체를 완성했다. 여기에 추사가 남긴 또 하나의 걸작이 ‘세한도’다. 선생이 중앙에서 물러나 잊혀지고 있을 때 스승을 잊지 않고 책을 보내던 이가 이상적이었다. 선생은 그 보답으로 세한도를 그려 고마운 마음과 자신의 꿈을 표현했다.
세한도는 당대에 큰 평가를 받아 조선과 중국의 선비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추사관에 가면 세한도를 평한 글들이 14m에 이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팬심’이 느껴지는 내용의 수많은 글이 네티즌의 ‘댓글’처럼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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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관. |
세한도에 등장하는 집은 후대에도 건축의 모티브로 쓰였다. 그러니까 추사 김정희는 조선 최초로 건축 설계자가 된 선비인 셈이다. 추사관이 바로 세한도를 형상화한 건물이다. 19세기의 그림을 21세기에 불러낸 사람은 건축가 승효상이다. 바깥에서 보면 세한도의 동그란 창문이 표현돼 있는데 내부에서 보면 이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느껴진다. 전시관 뒷편으로는 추사 선생이 기거하던 집을 재현한 조선시대 제주의 전통가옥도 관람할 수 있다.
[여행 정보]
[대중교통으로 여행지 가는 법]
서귀중앙여자중학교: 제주공항에서 버스 800번 승차 - 서귀포우체국 시청 정류장에서 하차 - 1번 승차 - 서귀중앙여자중학교 정류장에서 하차
[주요 스팟 내비게이션 정보]
서귀중앙여자중학교: 검색어 ‘서귀중앙여자중학교’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앙로 120
왈종미술관: 검색어 ‘왈종미술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칠십리로214번길 30
기당미술관: 검색어 ‘기당미술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성중로3번길 15
추사관: 검색어 ‘추사유물전시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평일 서귀중앙여자중학교 관람 시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왈종미술관
문의: 064-763-3600 / http://walartmuseum.or.kr/
관람시간: (하절기) 오전 9시30분~오후 6시30분 / (동절기) 오전 10시 ~ 오후 6시
관람요금: 성인 5000원 / 청소년·어린이·경로·군인 3000원
기당미술관
문의: 064-733-1586 / http://culture.seogwipo.go.kr/gidang
관람시간: 오전 9시 ~ 오후 6시 (7월 ~ 9월 오후 8시까지)
관람요금: 어른 1000원 / 청소년·군인 500원 / 어린이 300원
제주추사관
문의: 064-710-6802 / http://culture.seogwipo.go.kr/chusa
관람시간: 오전 9시 ~ 오후 6시 (7월 ~ 9월 오후 8시까지)
관람요금: 성인 500원 / 청소년·어린이·군인 300원
음식
보목동어촌계식당: 보목 포구에 위치한 식당으로 여름엔 신선한 물회가 대표메뉴다. 제주식 물회는 된장 베이스 국물에 초를 약간 넣어 먹는다.
한치물회 1만원~1만2천원 / 자리물회 1만원 / 성게칼국수 7000원 / 전복해물탕 3만~5만원
064-733-1077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보목포로 46
숙박
라마다 앙코르 서귀포호텔: 다양한 객실과 휘트니스클럽 등을 갖춘 호텔로 서귀포 중문에 위치해 관광지 접근이 편하다. 여름을 맞이해 제주 워터월드와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예약문의: 064-735-2000
☞ 본 기사는 <머니S> 제496호(2017년 7월12~1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