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550리 끝자락에 핀 멋과 맛
짠물과 만나는 망덕포구엔 윤동주 육필 시집이…


지난 21일 전남 광양시 망덕포구에서 광양만과 배알도를 바라보는 탐방객들. /사진=박정웅 기자
지난 21일 전남 광양시 망덕포구에서 광양만과 배알도를 바라보는 탐방객들. /사진=박정웅 기자

매화, 벚꽃, 산수유…. 은어떼 거슬러 오르는 강 굽이굽이마다 지난봄 영글었던 한바탕 꿈이 저문다. 550리 물길, 섬진강이 남해의 품에 안기는 광양만 망덕포구. 소만(小滿)에 인 골바람, 가을바람처럼 드세다. 술렁이는 바람결 헤집고 아이들 자전거 구르는 소리, 늦봄 끝자락 그윽한 포구를 깨운다.
고운 모래 드넓었다는 섬진강의 또 다른 이름인 다사강(多沙江). 수십만마리 두꺼비가 울부짖어 왜구가 급히 피했다는 옛 얘기는 모래톱과 함께 쓸려갔다. 그 사이, 웅장한 제철단지가 간척과 매립의 공간에 똬리를 틀었다. 그럼에도 민물과 짠물이 서로 만나는 기수역 포구엔 비린내 풀풀한 날것이 풍성하다.


◆강물 따라온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망덕포구는 가을전어로 유명하다. 전어 형상물이 조성된 망덕포구. /사진=박정웅 기자
망덕포구는 가을전어로 유명하다. 전어 형상물이 조성된 망덕포구. /사진=박정웅 기자

전북 진안에서 발원한 섬진강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맞대어 흐른다. 그 끝자락은 전남 광양의 망덕포구다. 망덕포구는 섬진강 담수와 남해 해수가 만나는 하구로 수산물이 지천이다. 예로부터 은어, 전어, 뱀장어, 재첩의 주산지로 유명세를 떨쳤다. 특히 망덕포구 가을전어 축제는 외지인에게 광양을 대표하는 축제로 자리했다. 포구 바로 앞에서 건져낸 잡어까지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다.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를 보존한 정병욱 가옥. /사진=박정웅 기자
윤동주 시인의 육필 원고를 보존한 정병욱 가옥. /사진=박정웅 기자

망덕포구를 바깥세상에 널리 알린 건 해산물만이 아니다. 바로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보존한 정병욱 가옥(등록문화재 제341호)이 먼저다.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동숙생인 정병욱 선생에게 증정한 자선시집이 이 가옥에 보존돼 있다. 정 선생과 그의 가족이 없었다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는 윤동주 시인과 함께 묻혔을 것이다.
정병욱 가옥에 소개된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 시인과 정 선생. /사진=박정웅 기자
정병욱 가옥에 소개된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 시인과 정 선생. /사진=박정웅 기자

정병욱 가옥은 1925년 양조장 겸용 주택으로 건립됐다. 윤동주의 대표작 19편이 수록된 육필 원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보존과 부활의 공간으로서 문화사적 가치가 크다. 일제강점기, 연희전문을 졸업한 정병욱은 1944년 강제징집 전 망덕포구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유고 보존을 부탁했다.
그는 저서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동주나 내나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고 유언처럼 남겨 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목숨을 보존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자 어머님은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던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꺼내주시면서 기뻐하셨다"고 술회했다.

1962년 망덕포구의 정병욱 가옥. /사진=박정웅 기자
1962년 망덕포구의 정병욱 가옥. /사진=박정웅 기자

또 망덕포구의 배경인 망덕산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군량미를 쌓아둔 곳으로 미적도(米積島)라 불렸다. 또 그 모양은 나비가 춤추는 형상을 닮아 무접도(舞蝶島)라고도 했다. 망덕산 정상에서 광양만 일대와 제철단지를 둘러보며 지명이 전하는 얘기와 역사의 페이지를 들춰보는 것도 좋으리라.
◆제철산단에 숨은 한국 최초의 김 시식지


망덕포구에서 태인대교를 건너면 공단이 자리한 태인도다. 다리를 건너기 전 망덕산과 천왕산을 잇는 망덕출렁다리가 하늘을 가른다. 그 길이는 짧지만 아찔한 게 혼을 쏙 빼놓는다.

태인도는 건너편 금호도에 광양제철소가 들어서면서 상전벽해를 맞았다. 광양제철의 배후 공단으로 산업적 가치가 크다. 소와 쇠를 섞어놓은 듯했던 우도(소섬)에서 금도(쇠섬)로 탈바꿈한 금호도의 지명 변천사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광양시 태인동 궁기마을에 자리한 광양 김 시식지. /사진=박정웅 기자
광양시 태인동 궁기마을에 자리한 광양 김 시식지. /사진=박정웅 기자

산업공단이 웬 여행지일쏘냐. 한자락 들춰보면 알게 된다. 태인도는 우리나라 최초로 김을 양식한 곳으로 기록됐다. 1640년(인조 18년) 태인도에 들어온 해은(海隱) 김여익이 김(海衣·해의)을 양식했다는 김 시식지(始殖址)가 태인동 궁기마을에 있다.
김 시식지 영모재에는 이 같은 내용의 비문 등이 전한다. 문헌에 따르면 김여익이 김양식법을 고안한 시기는 인조 18년에서 현종 원년(1660년) 사이로, 완도 조약도와 고금도의 김유몽과 정시원의 해의 시식설보다 빠르다는 게 정설로 통한다.

김의 이름 또한 금호도 지명 변천사처럼 재미있다. 소와 쇠를 비슷하게 부르는 것처럼 지역에선 김여익의 해의와 더불어 해우(海牛)를 혼용한다. 여기에 더해 김여익의 후손들은 조상의 성을 딴 김 유래설을 확신하는 분위기다. 또 성이나 해산물을 뜻하는 '김'을 '짐'으로 발음하는 광양만 사람들의 독특한 언어습관을 귀담아 들으면 공단 내 인문여행도 쏠쏠하다.

어쨌든 태인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김양식지임에 틀림없다. 섬진강과 남해가 만나기 때문에 영양이 풍부한 이점을 살린 김여익의 양식법이 시작된 곳이다. 당시 인공적으로 김의 포자를 받지 않고 밤나무가지를 꽂는 섶꽂이 방식을 이용했다. 이 방법은 19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백운산 참숯이 밑간인 광양숯불고기

"이 세상 최고의 맛은 마로현의 불고기다(천하일미 마로화적·天下一味 馬老火炙)"

광양읍 서천변 광양불고기 특화거리 초입. /사진=박정웅 기자
광양읍 서천변 광양불고기 특화거리 초입. /사진=박정웅 기자

광양 하면 불고기를 빼놓을 수 없다. '천하일미 마로화적'은 광양(옛 마로현)에 귀양을 왔던 조선조 한 선비에서 유래한다. 유배지에서 성밖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그의 부모가 사은의 뜻을 담아 암소를 잡아 대접했다는 게 광양불고기의 효시다. 귀양이 풀려 한양에 돌아간 선비는 그 참맛을 잊지 못했다는 것.
자식의 은사에게 바친 음식답게 광양불고기는 귀한 음식이다. 농경사회에서 큰 자산인 소를, 특히 암소를 내놓는 데다 얇게 저민 고깃살을 한 점씩 구리석쇠에 구워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다. 말이 불고기지 여기 쓰는 고기는 모두 그냥 구워도 감칠맛 뛰어난 꽃등심과 갈비살이다. 여간 손이 많이 드는 까닭에 흔한 떡갈비와는 차이가 있다.

백운산 참숯으로 굽는 광양불고기. /사진=박정웅 기자
백운산 참숯으로 굽는 광양불고기. /사진=박정웅 기자

또 참숯의 은은한 향과 맛도 느껴야 한다니 기막힐 노릇이다. 선비와 지역민의 까다로운 입맛을 단박에 따라갈 수 없는 게 암소 식재료 밑에 깔린 백운산 참숯 때문이다. 백운산 참숯은 숯불고기와 더불어 닭숯불구이나 숯불장어구이 등 광양구미(九味)의 3할을 차지하는 밑간인 셈이다. 광양읍 서천 광양숯불고기 특화거리에 전국의 식도락들이 꼬리를 문다.
◆광양여행 교통팁

순천역-중마관광안내소-광양버스터미널에서 주말마다 출발하는 '햇빛 광양 투어'를 눈여겨보자. 계절에 따라 봄코스(4월21일~6월10일), 야경코스(6월16일~8월26일), 가을코스(9월1일~11월25일)가 있다. 봄코스는 역사문화관-장도박물관-서천꽃길-옥룡사 동백나무숲-와인동굴-구봉산전망대를 돈다. 야경코스는 망덕포구(정병욱 가옥)-망덕출렁다리-느랭이골 별빛축제-무지개다리-구봉산전망대를, 가을코스는 백운산휴양림-옥룡사 동백나무숲-구봉산전망대-망덕포구(정병욱 가옥)-느랭이골을 각각 찾는다. 광양행 대중교통(서울발)으론 고속버스(4시간10분), 기차(KTX 순천역 기준 2시간50분), 항공(여수공항 기준 1시간)편 등이 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2호(2018년 5월30일~6월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