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 ⑨ 조선 중기의 3대 비극 주인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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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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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일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여해(汝諧)는 나라를 바로잡을 재주와 나라를 어려움에서 구한 공이 있습니다.”
장장 6년여나 끌며 조선을 짓밟았던 임진·정유왜란이 끝난 뒤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파병됐던 진린(陳璘) 명나라 제독이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평가한 부분이다. 여해는 이순신의 자.

그가 있음으로써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확보했고 그 덕분에 서해를 거슬러 올라 한양, 평양으로 진격하려던 왜군의 전략이 무너졌다. 무엇보다도 곡창지대인 호남을 왜적의 유린에서 보호했다. 이에 힘입어 한양과 평양마저 내주고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정권을 연장할 수 있었다.

◆충신과 간자 구분 못한 임금 선조

선조는 자신의 왕권을 지켜준 이순신을 오히려 죽이려 했다. 1597년 1월25일 금부도사에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잡아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왜군이 1592년에 조선을 무단 침략한 임진왜란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이순신을 잡아들이는, 적 앞에서 스스로 무장해제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상황은 이렇다. 간첩 요시라가 경상 우병사 김응서를 찾아가 가토 기요마사가 10만대군을 이끌고 재침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알려줬다. 김응서는 이 내용을 선조에게 보고했고 선조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부산앞바다로 나가 왜군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요시라가 간첩이라는 사실과 부산앞바다로 나가면 적의 계략에 말려들어 큰 패배를 당할 것을 알아차린 이순신은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의금부에 끌려와 모진 고문을 당한 이순신. 권율 도원수와 이원익 체찰사 등이 나섰지만 옹졸한 선조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후 정탁 등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권율 장군 밑으로 들어가 백의종군했다.

해군참모총장이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군통수권자의 의심만으로 계급도 없는 졸병으로 강등된 셈이다. 이순신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부산앞바다 출동 명령의 부당성을 몇차례 제기하다 결국 칠전량해전에서 조선수군이 궤멸되는 패배를 당했다.


공황상태에 빠진 선조는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해군참모총장’에 기용했다. 이순신은 남은 12척의 배를 갖고 울돌목(鳴梁)에서 왜군 133척과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운명의 1598년 11월19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했다. 그는 ‘선조의 질투’로 전쟁이 끝난 뒤 무슨 올가미를 씌워서라도 자신을 죽일 것임을 간파했다. 어찌 보면 싸움터에서 죽음으로써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닐까.

◆병조호란 부른 무고와 지도자의 무능

정유왜란이 끝난 지 불과 26년밖에 안된 1624년 1월22일.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은 휘하의 1만여 병력을 이끌고 영변을 떠나 서울로 진군했다. 인조가 모반의 사실여부 조사 명목으로 자신의 외아들인 이전을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영변으로 보내자 일으킨 일이다. 아들이 모반죄로 죽는다면 본인도 온전할 수 없을 것이라 보고 반란으로 선수 친 것.

이괄은 당시 최고 무장이었다. 그는 9개월 전인 1623년 4월11일 김유, 이귀, 이서 등의 주동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왕으로 세운 ‘인조반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맡았다. 그 덕으로 포도대장을 거쳐 후금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평안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됐고 그해 10월에 이뤄진 논공행상에서 2등 정사, 공신의 첫째가 됐다.

그런데 이듬해 정월, 문회 허통, 이우 등이 그가 외아들 이전을 비롯해 한명련 정충신 등과 반역을 꾀한다고 고변했다. 조사 끝에 무고임이 밝혀져 조사 담당관들이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 했지만 당시 집권층은 오히려 이괄을 부원수직에서 해임하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국문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인조는 이괄에 대한 논의는 묵살했지만 그의 외아들을 압송하라고 했다.

간신에 둘러싸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인조는 이괄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장한 셈이다. 이괄 반란군은 2월11일 서울에 입성했고 인조는 충남 공주로 피난을 갔다. 지방에서 난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한 것도 왕이 반란을 피해 도망간 것도 역사상 최초였다. 이괄은 선조의 아들인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했지만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 지방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패배한 뒤 도망가다 부하 장수들의 배반으로 2월15일 목이 잘렸다.

인조의 바보짓으로 당시 최고의 장수를 잃은 조선은 3년 뒤 정묘호란을 당했다. 반란에 참여했던 한명련의 아들 윤이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의 상황을 자세히 알리고 침략을 종용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차린 인조는 병력을 키우는 등의 대비를 하지 않은 채 후금을 화나게 했고 결국 백성들을 병자호란이라는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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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의 호연지기 짓밟은 기득권 세력

“백두산 돌은 칼 가느라 다 없어지고/두만강 물은 말이 마셔 말랐구나/남아로 태어나 20에 나라 평정하지 못하면/후세에 누가 대장부라고 부를까”

예종 1년인 1468년 10월, 반란의 누명을 쓰고 거열형(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고 사방으로 끌어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한 남이 장군이 남긴 시다. 세조의 외고종조카(태종의 딸인 정선공주와 의산군 남휘의 손자)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건주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27세에 공조판서, 28세에 병조판서를 지낸 그는 세조가 죽자 급격히 추락했다.

예종 1년, 유자광은 남이 장군의 시에 나오는 ‘미평국’(나라를 평정하지 못함)을 ‘미득국’(나라를 얻지 못함)으로 고쳐 반란을 꾀했다고 고변했다. 예종은 그를 거열형에 처했지만 350년이 흐른 뒤인 1818년(순조 18년)에 사면됐다. 관직이 복권되고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다. 

나라를 바로잡고 나라를 구할 재주를 가졌던 남이, 이순신, 이괄. 그들은 임금을 잘못 만나 비명횡사했고 어리석은 임금은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내 것을 바탕으로 삼아 남의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패치워크(짜깁기)는 개인과 나라를 발전시키지만 패치워크는커녕 속좁은 질투에 휩싸이면 스스로는 물론 나라까지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준 조선중기 3대 비극이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55호(2018년 8월29일~9월4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홍찬선 전 머니투데이 편집국장
홍찬선 전 머니투데이 편집국장 [email protected]

바퀴, 날개달린 모든 것을 취재하는 모빌리티팀 박찬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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