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에서 세무사 자격증은 회계사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게 사실이다. 통상 경영학과커리큘럼 자체가 세무 위주로 짜여져 있지 않은데다 세무사는 아무래도 세무공무원 출신들이 '꽉 잡고' 있을거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계사를 위주로 준비해온 수험생들이라도 막상 시험이 닥치면 세무사 시험(세시)에도 한번 원서를 내보곤 한다. 두 자격증의 시험과목이 상당부분 겹치기 때문이다. 특히 1차 시험의 경우 과목이나 범위가 80%이상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무사 1차 다섯과목 가운데 회계학(재무회계, 원가회계), 세법학개론, 상법, 영어 등 네과목이 회계사 1차 과목에도 포함돼 있다. 다른 점은 회계사의 경영학, 경제학 대신 세시에선 재정학을 보고 있다는 정도인데 이 과목마저도 따지고 보면 경제학의 한 가지인 셈이다. 게다가 상법의 경우 회계사 시험(회시)에선 전체가 시험범위지만 세무사는 회사편만 떼어내 여기서만 출제한다. 따라서 회계사 공부를 해온 학생들이라면 사실상 별도의 준비없이 세무사에 응시해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세무사가 상대적으로 호락호락한 자격증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조세 전문가로서의 자질을 테스트하는 세시에서 세법학 개론 등은 특히 공들여 준비해야 하는 과목이다. 회시에선 잘 묻지 않는 구석진 부분에서까지 두루 출제되는데다가 지문도 보다 길고 까다로운 편이라는게 응시생들의 얘기다. 또 2차의 논술세법은 세법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와 법학적 논리를 테스트하는 시험이어서 고득점을 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때문에 논술세법에선 과락만 면하고 회계학에서 고득점을 노려 벌충한다는 전략으로 임하는 2차 응시생들이 많다.
최근 회계사 선발인원이 두배씩 늘어 회계업계에 유례없는 구직난이 몰아치자 세시쪽으로 방향을 트는 수험생들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회계사는 회계법인 등에서 2년 내외의 실무수습을 마치지 않으면 자격증 자체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런데도 늘어난 공급으로 인해 법인에선 합격생의 절반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세무사 합격자들은 현장실습 4개월을 포함, 6개월만 수습을 받으면 바로 개업이 가능해진다. 초기 경력에 조직생활이 꼭 필요한 회계사와 애초부터 개업이 목표인 세무사간의 결정적 차이다. 때문에 법인 입사가 어려운 고연령자나 여성, 지방대학 출신들은 처음부터 세시를 최종 타겟으로 공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또하나 회시와의 차이점은 절대평가라는 점. 1,2차 모두 과락(40점 미만)없이 60점 이상을 받으면 무조건 합격이다. 그런데도 2차 시험에선 선발인원을 채우지 못해 커트라인이 더 낮아지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세무사 선발인원도 확대됐다. 2000년 450명이던 합격자수가 지난 2년간 700~750여명으로 껑충 뛰었다. 이 가운데 많게는 250여명 정도가 1차나 2차과목 일부를 면제받는 세무공무원 출신들일 거라는 게 학원가의 추산이다. 시험합격이든 영업이든 세무사 영역 역시 경쟁이 치열해진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세무사들도 다른 자격증 소지자들로부터 자기영역을 지키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회계사, 변호사에게 자동으로 부여돼온 세무사 명칭을 이들이 쓸수 없도록 하자는 방안을 국회에 계류시켜 놓고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세무사들에게만 조세소송권이 독점적으로 부여되도록 해야 한다는 논의도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한경쟁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세무사들도 개업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젊은 합격자들 사이에선 세무법인 형태로 개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여러 세무사들이 공동출자,공동영업으로 부담도 나눠지고, 굵직한 기업 고객들을 유치, 규모의 경제도 노리자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은행,증권 할것없이 PB(고액 자산가 개인재산 관리) 열풍이 거세지면서 금융권에서도 조세전문가인 세무사들에 대한 수요가 종종 나타나고 있다. 부자들의 자산관리에는 절세 등 세금관리 노하우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PB전문 세무사란 아직은 소수 경력자에게 국한되는 좁은 기회인게 사실이다.
웅지경영아카데미에서 세무사 지망생들을 상대로 객관식 회계학을 강의하고 있는 조영주씨(공인회계사)는 "세무사들은 조세에 관한 한 회계사보다 탄탄한 법적 논리로 무장돼 있는 전문가 집단"이라면서 "양도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등 각자의 전공을 살려 이같은 전문성을 심화시킨다면 세무사들의 미답지는 아직도 많다"고 말했다.
인터뷰 / 안성현 세무사 - '자격증만 있으면 돈벌던 시대는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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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로서의 활동영역을 넓혀보고 싶었습니다."
2002년 시험에서 합격한 안성현 세무사(31, 선우세무회계컨설팅 근무)는 개인사무소보다 법인 형태의 개업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요즘, 예전같은 기장조정업무만 해서는 생존에 한계가 있습니다. 재산세제나 물밀 듯 들어오는 외국계 기업 등을 상대로 국제조세 등으로 까지 분야를 넓혀가야 합니다. 기업이나 개인의 의사결정도 마찬가집니다. 갈수록 세법뿐만 아니라 기타 법이나 회계 지식 등까지 동원된 총체적 판단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결국 컨설팅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거죠."
안씨는 회계사, 세무사는 물론, 변호사, 법무사, 변리사 등과도 제휴하는 컨설팅 네트워크 구축을 사무소의 지향하는 바로 꼽았다.
"세무사 자격증만 가지면 앉아서 돈벌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살아남으려면 꾸준한 자기계발을 해야 합니다."
세무사에겐 조세관련 지식도 중요하지만 네트워크를 만들고 사업을 추진해나가는 영업력이 더욱 중요하다는게 안씨의 판단. 때문에 세무사 수험생활에 뛰어들기 전 평탄한 월급쟁이보다 이 길이 과연 자신에게 맞는지 신중히 검토해봐야 한다고 그는 조언했다.
"세무사 시장이 포화상태라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세무공무원 출신들을 크게 우대하던 과거의 관청 분위기도 점차 사라져 젊은 세무사들도 실력만 있으면 성공할수 있습니다. 조세는 만인의 문제고 새로운 영역은 늘상 나타나게 마련이니까요."
손정숙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