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 깜깜한 밤을 낮처럼 밝히는 인간들이 늘고 있다. 밤을 뜻하는 'night'에 인간을 뜻하는 접미사 'cus'를 붙인 새로운 말도 등장했다. 말하자면 ‘심야형 인간’인 셈이다.

 

엄격히 말해 이들은 늦게 일어나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는 즈음에야 정신이 맑아지는 ‘올빼미족’과는 또 다르다. 이들에겐 낮이나 밤이나 시간의 구분도 경계선도 모호하다. 모두가 잠든 새벽녘에도 일하고, 먹고, 즐기며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간다.

밤을 지배하는 나이트쿠스

불야성(不夜城). 그야말로 우리는 지금‘불이 꺼지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밤을 낮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하루를 남보다 두배로 살아요”

-탐앤탐스 청계천점 장선영 점장

밤을 지배하는 나이트쿠스
 
지난 1월21일 새벽 2시 무렵 광화문 청계천의 탐앤탐스. 한낮의 시끌벅적함은 사라지고 몇몇 사람들이 노트북을 켜 놓은 채 자신들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있는 심야 데이트 커플, 서류를 잔뜩 쌓아두고 작업을 하는 듯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한쪽 구석에서는 노숙자로 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모습도 보인다.

 

이곳 매장을 책임지고 있는 장선영 점장이 졸음을 쫓는 데 좋다며 기자에게 커피 한잔을 건넨다.

 

“여기 밤 풍경은 거의 도서관이에요. 이 시간이 되면 낮과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것 같죠. 야근 마치고 여기에 와서 밤 늦게까지 공부하는 직장인들도 많고, 요즘에는 학생들이 밤 늦게 스터디할 만한 장소로 찾아오기도 하죠. 여기 오기 전에는 청담동 24시간 매장에서 일했는데 밤 풍경이 천지차이에요. 거긴 유흥가가 많아서 그런지 밤이나 낮이나 똑같았거든요.”

 

아무래도 손님도 적고 한가한 쪽이 일하는 입장에서는 더 수월하지 않을까. 그러나 장 점장이 손사래를 친다.

 

“우리는 아르바이트생을 쓰지 않아요. 매장 곳곳에 CCTV가 설치돼 있어서 한밤중이라도 직원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다 지켜볼 수 있어요. 쪽잠이라도 자다 인사고과에 반영되면 큰일이니까 딴 일은 절대 못해요. 잠 쫓으려고 일부러 청소를 하기도 하고 되도록이면 몸을 움직이려고 하죠.”

 

한밤중에 일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한데 쉬지도 못한다니 듣고만 있어도 고단함이 전해져 온다. 그러나 장 점장은 일부러 야간 근무를 지원하는 직원들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정상 근무조에 비해 월급이 20%가량 높은데다 낮시간에 학교를 다니거나 공부를 하면서 하루를 남보다 더 알차게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밤을 지배하는 나이트쿠스

“물론 대다수의 직원들은 야간 근무를 지원했다가 2달 정도면 한계에 부딪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정말 목적이 뚜렷한 직원들은 오래도록 야간 근무에도 잘 적응해 나가는 것 같아요. 보통 야간 근무는 2~3명 정도만 배정이 되는데 지금 우리 매장만 보더라도 나이는 어리지만 정말 열심히 사는 친구들이거든요.”


장 점장은 "남편도 동대문에서 도매상을 하며 밤에 일하는 사람이라 낮밤이 바뀐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안다"며 말을 잇는다.


"우리집에는 안방에 암막커튼이 필수에요. 빛 하나 들어오지 않게 하는데도 이상한 게 낮보다는 밤에 자는 것이 더 상쾌하고, 밤에 일하면 낮에 일하는 것보다 두배로 피곤해요. 밤에 일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야간 근무조 직원들이 더 기특하고 더 잘해주고 싶은 게 사실이죠."


◆“돈 독 올랐다고요?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는데요."

-불고기전문점 개화옥 김선희 사장

밤을 지배하는 나이트쿠스


“니가 돈독이 제대로 올랐구나?”


압구정에서 24시간 불고기전문점 개화옥을 운영하고 있는 김선희 사장. 2006년 무렵, 밤 11시까지 운영을 하던 가게를 24시간 매장으로 바꾸겠다고 하자 그의 지인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돈 벌려고 고생을 사서한다"면서 말렸다고 한다.


“정작 저는 돈 때문에 24시간 운영을 결심한 건 아니었어요. 식당 운영시간이 보통 아침 10시부터 밤 11시 정도까지잖아요. 그런데 아침에 나와서 하루하루 식당 운영 준비를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한 거에요. 밤에도 손님이 떠날 때까지 직원들을 보내놓고 저 혼자 남아서 가게를 지키다가 그 다음날까지 영향을 받는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아예 가게 문을 항시 열어 놓자고 생각한 거죠.”


실제로 24시간 운영을 한 후 김 사장은 “밤에 일하는 직원들이 미리 오픈 준비를 해 놓으니까 낮 직원들이 훨씬 여유롭게 시작할 수 있다. 특히 나는 물론 손님들도 부담 없이 머무를 수 있어서 만족이다”고 말한다.


“보통 주점이 아니라 불고기전문점 같은 식당에서 24시간 운영을 한다고 하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아요. 밤 10시나 11시쯤 술 마시기는 부담스럽고 갈 곳 없을 때 일부러 우리 매장을 찾아 오는 사람들도 꽤 많고요.”

 

덕분에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매출에서도 효과를 많이 봤다는 게 김 사장의 설명이다.

“사실 처음 2년 동안은 밤 동안 손님이 없어서 힘들었어요. 직원들 월급은 줘야 하는데, 가게는 텅텅 비어 있고. 그 모습을 보고 집에 가면 잠도 안 와요. 한밤중에 취객이랑 실랑이를 하고 있으면‘내가 이게 무슨 고생인가’하는 생각도 많았죠.”


24시간 매장이라는 게 조금씩 입소문이 퍼지고 가게가 안정화되기까지 꼬박 2년의 시간 동안 속앓이를 했다는 김 사장.

“시간이 정답이더라고요. 지금은 24시간 매장이라서 우리 가게에 오는 단골들이 더 많아요. 24시간 매장으로 바꾼 거요? 절대 후회 안 하죠. 한동안 마음고생을 하긴 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오히려 우리 가게가 잘 되는 데 24시간 매장 덕을 톡톡히 본 걸요.”

◆“일하는데 밤낮이 따로 있나요.”
-반딧불이 송파점 김현태 점주

밤을 지배하는 나이트쿠스


반딧불이 송파점의 김현태 점주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밤일’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늘어가고 있다.

 

실내환경전문업체 반딧불이는 새집증후군과 헌집증후군 등 집에서 발생하는 오염물질을 제거해주는 일을 하고 있다. 화학물질이나 신기술 기기를 사용하는 등 작업 특징에 따라 소요되는 시간은 보통 12~15시간 정도.


김 점주는 “고객이 원하는 시간 대에 맞춰서 일을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밤낮없이 일하는 편이다. 특히 사무실이나 어린이집 등 낮 동안에 영업을 해야 하는 곳에서는 밤에 작업을 하는 일이 왕왕 있다”고 말한다.


특히 최근에는 신종플루 여파로 어린이집이나 키즈 카페 같은 곳의 작업이 부쩍 늘어났다. 어린이집의 경우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간 저녁 8시쯤 시작해서 다음날 아이들이 오기 전인 아침 7시 전까지 작업을 끝내려면 상당히 바쁜 밤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김 점주의 설명이다.

 

“사실 일하는 데 밤이나 낮이나 큰 차이는 없어요. 요즘은 야식 꺼리도 많고 밤에도 전혀 불편한 게 없이 워낙 잘 돼 있잖아요. 다만 밤에 일하다 보면 자꾸 야식 생각이 나서 살이 찐다는 게 단점이죠,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