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남소문터에서 동대입구 지하철역 반대방향으로 올라가면 국립극장사거리다. 장충단길과 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 정문, 남산공원으로 향하는 길이 만나는 곳이다. 서울성곽을 살펴보려면 국립극장 쪽으로 길을 건너야 한다.
국립극장은 남산 동쪽 언덕에 있다. 1950년 4월29일 옛 부민관(현재 중구 세종대로 서울시의회 의사당자리)에 창설된 국립극장은 1952년 12월15일에 대구로 자리를 옮겼다가 1957년 6월1일 옛 명동예술극장으로 이전했다. 1973년 10월17일부터는 공연·예술의 종합극장으로 남산에 문을 열었다. 이곳은 1974년 8·15 광복절 경축식 행사 도중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한 장소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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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기 |
국립극장사거리로 올라가면 남산공원순환도로와 만난다. 남산매표소에서 9시 방향으로 꺾이는 도로를 따라 100m쯤 걸으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성곽길은 왼쪽으로 가야 한다. 오른쪽 길은 남산 북사면에 놓인 순환도로다.
왼쪽 갈림길로 50m쯤 지나면 성곽이 보인다. 이 성곽은 남산순환도로와 만나 끊겼다가 길 건너 가파른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도로에는 성곽이 지나간 흔적과 중구 및 용산구의 행정구역 경계표시가 있다. 도로 위쪽은 용산구, 아래쪽은 중구다. 이 또한 한양도성성곽이 행정구역과 일치함을 보여준다.
◆나무계단 따라 성곽을 걷다
남산 정상을 향해 나무계단 성곽탐방로를 따라가면서 성곽을 바라본다.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쌓아올린 것을 보면 태조 때 쌓은 성곽임을 알 수 있다. 겉으로는 엉성해 보이지만 600여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튼튼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긴 세월풍우에 깎인 성벽의 시커먼 외관이 의연하고 자랑스럽다.
나무계단은 250m나 이어진다. 남산의 높이가 265m로 낮은 산이라지만 끝까지 오르자면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오르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계곡이 깊고 아기자기하다. 특이한 것은 나무계단에 50m 단위로 거리를 표시했고 신기하게도 50m, 100m, 150m 지점 등에 세종 때와 태조 때와 숙종 때 것으로 보이는 각자성석이 있다.
처음에 보이는 것은 ‘禁/二所 五百七十步’(금/이소 오백칠십보, 1보는 6척으로 약 1.82m)인데 숙종37년(1711) 각자다. 禁(금)은 광희문에서 돈의문 구간을 관할했던 금위영(禁衛營)을 말하고 二所(이소)는 두 구간, 오백칠십보는 성곽을 쌓은 거리가 570보라는 의미다. 다음은 태조 때의 ‘巨字終闕百尺’(거자종궐백척) 각자다. 巨(거)는 천자문 51번째 글자고 闕(궐)은 52번째 글자다. 따라서 거자 육백척 구간이 끝나고 궐자 육백척 구간 중 첫 백척이 시작되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번째는 ‘第五/一百/判官/陳(原)吉’(제오/일백/판관/진원길) 각자. 제오 다음에 십(十)자가 지워졌다고 본다면 50번째 소구간 100척을 판관 진원길이 감독했다는 각자다.
나무계단으로 된 성곽탐방로는 250m 지점에서 초소처럼 보이는 구름다리에 닿는다. 다리를 건너 도성 안으로 들어가면 성벽이 가려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 가까운 탐방로는 경사가 완만해 한결 걷기 쉽다. 남산정상이 가까워지자 다시 힘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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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
군사정부시절 남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문과 날조로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가 남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보부건물은 유스호스텔로 사용된다.
서울시는 2009년 3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 이후 고도 성장기에 훼손되고 고립된 남산의 제 모습을 복원하는 사업이다. 이를테면 북측 산책로부터 한옥마을과 장충단공원을 잇는 구간에 실개천이 조성되고 용산공원과 녹지공간으로 연결된다.
이 사업을 통해 생태환경 복원과 역사성 회복을 위한 다양한 계획이 수립됐지만 진정 남산다운 것을 시민에게 돌려줄 사업은 부진하다. 남산을 문화와 예술이 연결된 특화공간으로 디자인해 관광명소로 육성한다는 사업이 거론되는데 환경파괴가 우려되기도 한다. 자연은 심고 가꾸는 것이지 파헤치고 짓고 때려 부수는 게 아니다.
구름다리를 나와서 완만한 내리막길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남산순환도로와 다시 만난다. 거기서부터 왼쪽으로 성곽의 여장이 나타난다. 성곽은 남산타워까지 끊어졌다 이어졌다가를 거듭한다. 오르막길 오른쪽에 ‘목멱산봉수대 터’(木覓山烽燧臺址)를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세종실록의 기사에 근거해 추정하면 현재 미군통신부대가 들어선 곳에 있었다는 제1봉수대에 해당될 것이다.
남산 정상 버스정류장을 지나 정상에 도달했다. 남산타워가 남쪽으로 서 있고 넓은 자리를 차지한 남산팔각정도 다사다난했던 근대사를 말해준다. 남산타워 옆 정상에는 서울의 중심점이라는 ‘남산의 2등 삼각점’ 조형물이 바닥에 박혀있다. 그러나 이것은 1914년 일제강점기에 한반도 18개 도시 간 거리를 나타낸 표시로 실제 서울의 중심점은 아니라고 한다. 원판에는 25개의 구의 이름이 해당 구의 방향으로 새겨져 있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이다.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는 산신령이 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뫼’라는 이름도 있다. ‘마’는 마파람에서 보듯이 ‘앞’이라는 뜻이고 뫼는 산이므로 마뫼는 ‘앞산’이라는 말이다. 밝은 산이라는 뜻의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불렀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497호(2017년 7월19~2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