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서울타워’는 서울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자 현대의 서울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그래서인지 예전 이름인 ‘남산타워’라고 부를 때 더 친근감이 든다. 남산 꼭대기 부근 해발 480m(건물 높이는 236.7m)에 우뚝 솟아 날이 좋으면 전망대에서 인천항과 개성 송악산까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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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
남산타워는 1969년 12월 동양방송·동아방송·문화방송 등 3곳의 방송국이 공동투자해 1975년 8월 완공했다. 수도권에 TV와 라디오전파를 송출하는 종합 전파 탑, 관광용 전망대로 사용하려고 세웠고 1980년부터 일반에 공개했다. 2000년 YTN이 인수하고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2005년 N서울타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장했다. 지금은 복합문화공간으로 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타워 앞 광장 난간에는 수많은 ‘사랑의 자물쇠’가 매달린 것을 볼 수 있다. 그 모양도 제각각이다. 이곳에 자물쇠를 걸기 시작한 건 한 TV프로그램에서 두 주인공이 사랑의 자물쇠를 거는 모습이 방영되면서부터다.
◆팔각정과 국사당 터
1955년 10월3일 개천절. 남산에서 이승만 동상 기공식이 열렸고 이듬해 광복절에 준공식을 진행했다. 이어 1959년 11월13일에는 남산 정상에 팔각정을 짓고 이름을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정’이라고 했다. 이 큼직한 정자는 4·19혁명 후 그의 동상과 함께 철거됐다가 ‘남산팔각정’이라는 이름으로 재건, 오늘에 이르렀다.
남산의 북쪽으로는 북한산에 이어 백악산, 인왕산, 낙산이 도성의 심장부를 안고 있다. 남쪽으로는 강남지역의 빌딩숲으로부터 떨어진 관악산, 청계산, 청량산이 좌우로 펼쳐졌다. 바로 눈 아래로는 한남동과 이태원이 보인다. 국사당과 봉수대를 본 다음 이태원에 들르는 것도 좋다.
팔각정 옆으로는 ‘국사당 터’(國師堂址) 표지석이 있다. 국사당의 옛 이름은 ‘목멱신사’(木覓神祠)다. 조선 태조 4년(1395) 12월 남산 산신령을 목멱대왕으로 봉작하고 목멱신사를 세워 국사당이라고 불렀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우면서 철거한 국사당을 어떤 유지가 인왕산 선바위 근처로 옮겨 현재에 이른다. 일제가 국사당을 철거한 이유는 그들의 신사보다 국사당이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히 없애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남산의 봉수대
조선시대 경봉수(京烽燧)라고 했던 남산의 봉수대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3호다. 남산봉수대를 설치한 연대는 여러 설이 있으나 태종 6년(1406)이 정설이라고 생각된다. 이 봉수대는 1895년(고종 32년) 갑오경장 때까지 489년간 존속했다. 1993년 새롭게 복원된 봉수대는 남산 정상에 있다. 남산에 모두 5개의 봉수대가 있었는데 복원된 봉수대 자리는 평안도 방면의 봉수를 받았던 제3봉수대에 해당한다.
제1봉수대는 함경도 경흥에서 아차산(봉화산)으로, 제2봉수대는 경상도 동래에서 광주 천림산으로,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에서 내륙을 따라 무악동 안산 동봉으로,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에서 해안을 따라 무악동 안산 서봉으로, 제5봉수대는 전라도 여수에서 개화산(양천)으로 전달하는 봉수를 받았다.
이같이 남산봉수대는 전국 8도에서 올리는 봉수의 종착점이었다. 봉수를 남산으로 집결시킨 이유는 최종 종착점인 병조, 즉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서 남산이 내사산 중 가장 잘 보였기 때문이다. 또 남산이 한양 남쪽 중앙에 있으므로 각 봉수대의 봉수 전달 횟수를 최소화할 수 있는 효율적인 장소여서다.
조선시대 남산의 봉수대 자리는 어디일까. ‘세종실록’의 기사에 근거하면 제1봉수대는 남산에서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현재 미군 통신부대자리에 있다. 제2봉수대는 남산 2등 삼각점 일대, 제3봉수대는 현재 복원된 봉수대자리, 제4봉수대는 케이블카정류장 아래 평탄지, 제5봉수대는 옛 남산식물원 일대였을 것이다.
봉수는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에 알리거나 중앙의 긴급한 사항을 지방에 알려 위기에 신속히 대처하도록 하는 통신수단이다. 모두 5가지의 신호를 썼는데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봉홧불을 피워 올렸다. 평상시에는 연기가 하나, 적이 나타나면 둘, 경계에 접근하면 셋, 경계를 침범하면 넷, 적과 접전 중이면 다섯을 피워 올렸다. 그러나 비가 오거나 기타 이유로 봉수를 볼 수 없을 때는 봉수군(烽燧軍)이 다음 봉수대로 말을 타고 달려가서 상황을 알렸다. 봉수대 사이의 거리는 4~4.5㎞로 10리 정도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10㎞ 정도 되는 곳도 있었다.
전국 어느 곳에서든지 12시간 안에 한양에 도착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봉수군의 근무태만으로 봉수가 늦게 전달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였다. 당시 인조가 신속히 피신하지 못한 것은 봉수가 도중에 끊겼기 때문이다. 이후 선조30년(1597)정유재란 때 보다 신속한 중국의 파발제(擺撥制)를 도입한 배경이다.
조선시대 남산봉수대 5개에서 올라가는 한줄기 흰 연기는 태평성대를 의미했고 평화로운 연기를 보며 백성들은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499호(2017년 8월2~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