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일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영화 <관상>에서 김종서 역할을 맡은 배우 백윤식. /사진제공=㈜쇼박스
영화 <관상>에서 김종서 역할을 맡은 배우 백윤식. /사진제공=㈜쇼박스

1453년 10월10일 밤. 한가위 잔치가 끝내고 가을걷이에 본격적으로 나서려는 결실의 계절. 안타까운 역사의 매듭 하나가 지어졌다.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유숙, 양정, 어을운 등 심복을 이끌고 좌의정 김종서 집에 가서 그를 철퇴로 살해했다. 이어 영의정 황보인과 조극관, 이양 등 여러 고관을 궁궐 문앞에서 채찍으로 쳐 죽였다.
역사는 이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기록했다. 검은 닭의 해인 계유년에 나라의 어려움을 평정했다는 뜻이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단종이 13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지 1년5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를 통해 정권을 잡은 세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2년 뒤 단종을 폐위,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 보냈다가 나중에 사약을 내려 죽였다.

◆군사쿠테타로 왕이 된 세조

세종이 1450년에 세상을 떠나고 5년도 안돼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세조가 됐고 정인지, 권람, 한명회 등 43명은 정난공신으로 일세를 떵떵거렸다.


하지만 어린 조카를 무력으로 내쫓고 정권을 장악한 쿠테타였던 ‘계유정난’은 조선 역사에 씻기 어려운 3가지 부작용을 가져왔다. 우선 옳음을 되찾는다는 ‘반정’이란 명분을 내세운 군사 쿠테타가 반복됐다. 1506년 9월1~2일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중종으로 옹립한 중종반정과 1623년 4월11일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능양군 이종을 인조로 추대한 인조반정이 그것이다.

군사쿠테타는 인재의 대량 살육을 수반함으로써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초래했다. 계유정난부터 세조 즉위 이후까지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은 죽임을 당했고 생육신(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은 은둔한 것이 대표적이다.

세조는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는 학자가 많이 모인 집현전을 없앴다. 세종이 한글창제와 ‘C4J0K21O19’라는 눈부신 성과를 일궈낸 기반을 없애버리는 불효까지 저지른 것이다. 인조반정 직후에는 당시 최고의 무장인 이괄이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아 소환위기에 처하자 반란을 일으켜 살해됐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불과 12년 전이었다.


군사쿠테타와 대규모 인재 살육은 조선을 건국한지 불과 60여년 만에 새 국가의 활력을 없애는 요인이 됐다. 조선은 이후 영·정조 때의 짧은 중흥기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1910년 8월29일)를 겪게 된다.

◆성인이 된 주공 vs 패자가 된 두 태종

은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을 몰아낸 역성혁명으로 ‘주’를 세운 무왕이 즉위 3년 만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나이 어린 성왕이 즉위했고 무왕의 이복동생인 주공은 성왕의 섭정이 돼 목숨을 걸고 보좌했다.

그는 동생인 관숙과 채숙이 ‘주공은 성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리며 은나라 주왕의 아들인 무경과 함께 일으킨 난을 평정하는 등 7년간의 섭정으로 주나라의 정치 사회제도를 정립했다.

공자는 주공을 후세 황제와 대신들 및 유학자들이 본받아야 할 성인으로 추앙했다. 스스로 천자가 되려는 욕심을 누르고 어린 조카에게 사양함으로써 황제보다 더 큰 영예를 청사에서 누린 것이다.

하지만 당태종과 조선의 태종은 정반대의 길을 갔다. 당 태종 이세민은 수 양제를 무찌르고 당을 건국한 아버지 당 태조 이연이 살아있을 때 황태자인 형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죽이는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황제가 됐다. 조선의 3대왕 태종 이방원도 태조 이성계가 생존해 있을 때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당 태종은 정변을 통해 황제가 된 뒤 건국 초기인 당의 기반을 확고히 다져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뤄냈다. 조선 태종도 약화된 왕권을 튼튼히 하면서 세종이 치세를 일궈낼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럼에도 두 태종에게는 항상 ‘불효’, ‘성공한 쿠테타’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할을 맡은 배우 이정재. /사진제공=㈜쇼박스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할을 맡은 배우 이정재. /사진제공=㈜쇼박스

◆세종의 최대 실수 ‘후계구도’

세종은 1417년에 태어난 둘째아들이 늘 걸렸던 것 같다. 세자인 장남 문종에 비해 무예가 뛰어나고 병서에 밝아 ‘대권 욕심’이 엿보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둘째 아들의 대군 이름을 진평(晉平), 함평(咸平), 진양(晉陽)으로 고쳐 부르다 1445년에 수양(首陽)대군으로 정했다.
고심 끝에 수양으로 낙점한 것은 은나라 제후 고죽군의 두 아들인 백이와 숙제가 은 주왕을 치려는 주 무왕을 말리다 실패하자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먹으며 살다 굶어죽었다는 고사를 떠올리며 왕권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문종이 비록 학문이 뛰어나 한글창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인덕이 있었으나 병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세종은 그가 죽으면 둘째 아들이 뭔가 일을 벌일 것을 내다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세종은 아버지 태종처럼 왕권의 기반을 다져주지 않았을까. 아마도 세종은 한글창제를 적극 반대한 최만리 등 기득권 신하들을 수양대군이 적절히 견제해줄 것으로 기대했는지 모른다.

실제로 문종이 훙한 뒤 어린 단종이 즉위하고 김종서 등 대신들이 정권을 좌지우지하자 훗날 사육신이 된 집현전 학자들이 그들의 국정논단을 비판하며 수양대군의 역할을 은근히 기대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똑똑한 현인은 역사에서 배우지만 미련한 불초자는 교훈을 읽지 못한다. 역사에서 배우려면 열린 마음으로 앞선 사람들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게 패치워크(짜집기)를 하는 사람은 완성된 사람(成人)이 돼 성인(聖人)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일시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는 패자(覇者)가 되더라도 결국 패자(敗者)가 된다는 게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엄중한 교훈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54호(2018년 8월22~2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