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2월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사진은 1960년 부통령 선거에 투표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 /사진=대통령기록관
1960년 2월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사진은 1960년 부통령 선거에 투표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 /사진=대통령기록관

1960년 2월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모여 결의문을 낭독했다.

"오늘은 바야흐로 주위의 공장 연기를 날리지 않고 6일 동안 갖가지 삶에 허덕이다 모이고 모인 피로를 풀 날이요, 내일의 삶을 위해 투쟁을 위해 그 정리를 하는 신성한 휴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하루의 휴일마저 빼앗길 운명에 처했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하고 12년 후. 대구 학생들이 일요일 낮에 거리로 나왔다. 전후의 아픔이 치유되기도 전 이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와 맞닥뜨린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점이었다.

평소와 다른 그날의 일요일은 우리나라 최초 민주주의 혁명인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이건 선 넘었지"… 일요일에 등교하라니

1960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학생들이 나섰다. 사진은 2024년 열린 2·28민주운동 64주년 기념 특별기획 사진전을 관람하는 관객의 모습. /사진=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1960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학생들이 나섰다. 사진은 2024년 열린 2·28민주운동 64주년 기념 특별기획 사진전을 관람하는 관객의 모습. /사진=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1960년 2월25일. 대구의 고등학교 종례 시간.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일요일에 등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학교 측은 단체 영화 관람이나 토끼 사냥 등의 핑계를 대며 등교를 지시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진짜 이유는 이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이 12년의 장기 집권을 이어가려는 욕망이었다.

집권 연장에 위기를 느낀 이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이 야당 후보의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일요일 등교를 지시한 것이다. 그 일요일은 1960년 3월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와 제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야당인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가 대구 수성천변에서 유세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선거 기간 중 사망해 이 대통령은 단독 후보에 올라 낙선할 걱정이 크게 없었으나 이기붕 자유당 부통령 후보는 장면 후보의 아성에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 자유당 후보는 장면 민주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부통령제를 시행했다.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이 차기 대통령에 올라 남은 임기를 이어간다. 1960년 선거 당시 85세의 고령이었던 이 대통령의 건강 상태를 걱정한 정부와 여당이 민주당에 정권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 장면 후보의 유세를 방해한 것이다.

학생들은 이에 항의해 등교 지시 철회를 요구했으나 학교 측은 끝내 거부했다. 보다 못한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1960년 2월27일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학생 8명은 이대우 당시 경북고 학생부위원장의 집에 모여 결의문을 작성하고 시위를 계획했다.

2월28일 일요일. 학생들은 대구 거리에 모여 결의문을 낭독했다. 시위에는 경북고, 경북대 사대 부고, 대구고, 대구상업고, 대구농림고, 대구공업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등 대구 지역 8개 학교에서 1200여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나선 것이다. 1949년 이 대통령은 전후 높은 문맹률을 해결하기 위해 무상 초등교육 의무제를 도입했다. 시간이 흘러 1960년 이 대통령이 도입한 초등 의무 교육을 받고 자란 고등학생들이 사회 지식인의 역할을 한 것이다.

대구에서 마산, 전국으로… 독재 정권의 말로

1960년 2월28일의 시위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대구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2·28 기념 중앙공원의 기념탑. /사진=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1960년 2월28일의 시위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대구광역시 중구에 위치한 2·28 기념 중앙공원의 기념탑. /사진=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2월28일 벌어진 대구 학생들의 시위는 3·15 마산 의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선거 당일인 3월15일 마산 지역 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이 항의하는 과정에서 투표함이 넘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투표함에서 미리 넣어둔 자유당 후보를 찍은 표가 쏟아져 나왔다.

정권은 최인규 당시 내무부 장관을 필두로 부정 선거를 기획했다. 40%가량의 자유당 후보 표를 사전에 투표함에 넣어두는 '4할 사전투표'와 투표함 바꿔치기, 3~5명이 조를 이뤄 투표하도록 하는 공개투표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승만과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투표를 조작했다.

눈앞에서 목격한 부정 선거에 시민들이 항의하기 시작했고 민주당은 선거 중단을 선언했다. 선거 당일 마산과 광주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가 벌어진 3월15일 마산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 열사가 실종됐다. 김 열사는 실종 27일째가 되던 4월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수면 위에 떠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그의 죽음이 부산일보 보도로 세상에 드러나자 불씨는 전국으로 번졌다. 4월19일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이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다. 결국 이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7월24일부터 1960년 4월27일까지 이어진 이승만 정권의 끝이었다. 그렇게 대구에서 시작된 일요일 낮의 작은 불씨는 제1공화국의 막을 내린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운동인 4·19혁명의 시발점으로 기록됐다.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기록돼 계승되고 있다. 2018년 정부는 '2·28 민주운동 기념일'을 법정 기념일로 지정했다.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에 가면 2·28 기념 중앙공원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