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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 상장 직후 주가가 공모가를 밑도는 사례가 잇따르며 IPO(기업공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수요예측 단계에서 흥행에 성공했더라도 상장 첫날부터 공모가를 하회하거나 단기간 내 급락세를 보이는 사례가 반복됐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인 시장 부진을 넘어선 구조적 문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17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들어 5월까지 신규 상장한 34개 기업 가운데 10개(약 29.4%)가 현재 공모가를 밑도는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아이지넷(-56%), 데이원컴퍼니(-48.46%), 미트박스(-31.53%) 등 코스닥 상장 종목들의 부진이 두드러진다.
코스피도 예외는 아니다. 올해 상장한 씨케이솔루션(CK솔루션)은 상장 직후 일시적으로 상승세를 보였지만 이후 주가는 하락세로 전환됐다. 공모가 1만5000원이었던 주가는 현재 1만3000원대로 밀려난 상태다. 신규 상장 종목 중 3분의 1에 가까운 기업들이 상장 이후 부진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어 IPO 시장 전반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에도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상반기 시장 전반에 퍼진 냉기는 IPO 기류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상장을 목전에 뒀던 기업들이 수요예측 실패 등을 이유로 IPO를 잇따라 철회하면서다. LG CNS와 함께 '대어'로 꼽혔던 롯데글로벌로지스가 코스피 상장을 철회했고 산업용 공작기계 제조·판매회사인 DN솔루션즈의 코스닥 데뷔도 무산됐다.
상반기 IPO 흐름에서 공통적으로 지적된 문제는 '공모가 고평가'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시장 왜곡의 출발점으로 2018년 도입된 '코스닥벤처펀드'를 지목한다. 코스닥 시장 활성화 방안의 일환으로 출시된 이 펀드는 신탁재산의 15% 이상을 벤처기업 신주에 투자, 벤처기업 및 해제 7년 이내 기업 주식에 35% 이상 투자 시 코스닥 공모주의 30%를 우선 배정받는 구조로 설계됐다.
코스닥벤처펀드의 문제는 당시 함께 증가한 메자닌(전환사채·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이 IPO 시장의 왜곡 구조를 낳았다는 점이다. 펀드 자금의 15% 이상을 코스닥 신주 및 메자닌 자산에 의무적으로 투자하게 되면서 전환사채(CB) 시장의 과열을 불러왔다.
특히 2018년 이후 대거 발행된 메자닌 채권들은 일반적으로 3~5년 만기를 설정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전환 시점을 넘기지 못한 채 다수 물량이 2021년 저금리 환경에서 만기 연장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2024~2026년 사이 메자닌 만기가 집중되는 구조가 형성됐다는 분석이다.
IPO의 목적 '성장 or 엑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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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장 기업들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다. 과거 발행한 메자닌 상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부 기업은 IPO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기업 주가가 발행 당시보다 낮은 경우가 많아 투자자들이 주식 전환 대신 현금 상환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IPO의 본래 취지인 성장 자금 유치는 뒷전으로 밀리고 기존 투자자의 자금 회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실제로 지난해 상장한 2차전지 장비업체 제일엠앤에스의 경우 수년간 외부 투자 유치와 차입을 통해 운영자금을 조달해왔고 이 과정에서 코스닥벤처펀드 자금과 연계된 CB나 RCPS(상환전환우선주) 형태의 투자도 포함됐다. 상장 직전인 2023년 말 기준 제일엠앤에스의 부채비율은 345%에 달했다. IPO를 통해 조달한 약 357억원 가운데 295억원(약 82%)은 채무 상환에 사용 예정이었다. 사실상 과거 차입금과 메자닌 상환에 공모 자금 대부분이 투입됐던 셈이다. 현재 제일엠앤에스는 지난 4월 감사의견 거절 사유로 매매거래가 정지, 상장폐지 사유가 발생한 상황이다.
시장에서는 이 같은 회수 목적성 IPO를 가늠할 수 있는 몇 가지 신호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모 구조에서 신주 발행보다 구주 매출 비중이 높거나 공모 자금의 사용 계획이 성장 투자보다 채무 상환이나 기존 투자자 유동성 확보에 집중돼 있는 경우 회수 목적성이 강하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기존 재무적 투자자의 보호예수 비율이 낮고, 상장 직후 빠르게 지분을 처분하는 사례가 반복되는 것도 유사한 흐름으로 해석된다.
특히 이러한 자금 회수 목적을 가진 IPO가 늘어나면서 공모가 산정 과정에서도 회수 금액 극대화를 노리는 유인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수요예측 흥행 여부만으로 공모가를 결정하는 관행이 반복되면 기업의 실제 가치보다 고평가된 가격에 상장되는 사례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시장에서는 공모가 고평가 논란, 수요예측 부진, 상장 후 주가 하락이 반복되는 현상이 이 같은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본다.
실제로 기관투자자들의 수요예측 참여율은 점차 낮아지고 있으며 상장 후 주가 하락을 예상한 일반 투자자들의 단기 차익 실현 매매도 증가하는 추세다. 일부 기업은 아예 보호예수(락업) 설정 없이 상장을 추진하거나 기존 투자자들의 락업 비율이 과거 대비 크게 낮아진 상태에서 상장해 초기 유통물량 부담이 커지는 구조도 반복되고 있다.
나승두 SK증권 연구원은 "6월 들어 증시가 반등 흐름을 보이고 일부 정책적 기대도 작용하고 있지만 상장 직후 유통 물량 부담과 IPO 구조에 대한 불신은 여전하다"며 "IPO는 본래 성장 기업의 자금 조달과 투자자 보상을 위한 통로 역할인데, '투자-회수-재투자'의 선순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공모 청약보다 이후 수급과 기업 실적 등을 면밀히 따지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