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봄밤'은 권여선 작가의 동명 단편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소설에 등장하는 상황과 인물을 줄이고, 주인공 두 남녀의 감정에 오롯이 집중해 풀어낸 67분짜리 짧지만 강렬한 러브스토리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난 수환(김설진 분)과 영경(한예리 분)은 함께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국어교사였던 영경은 이혼 뒤 자신이 양육하던 아이를 전남편과 그의 부모에게 도둑맞듯 빼앗긴 뒤 술에 빠져 살았고, 결국 알코올 중독에 걸려 일을 그만두게 된다. 친구와 철공소를 운영하던 수환은 거래처의 횡포로 갑작스럽게 부도를 한 후 아내의 요구로 위장 이혼을 했다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신용불량자 신세가 됐다.

수환은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영경을 업어 집에 데려다준다. 그리고 마흔세 살에 만난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한다. 수환은 류머티즘성 관절염을 앓고 있고, 시간이 흘러 상태가 악화하는 바람에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병이 깊어진 두 사람은 함께 요양병원에 들어간다. 수환은 조금씩 몸이 굳어가고, 영경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어 매번 외출증을 끊어 병원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다.
의사들은 반대하지만, 수환은 영경이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실 수 있게 늘 허락해 준다. 그리고 그는 휠체어에 앉아 이틀만 있다가 돌아오겠다며 나간 영경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병에 걸려 서서히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영경과 수환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그저 힘 빠진 몸을 서로에게 기댄 채 또 한 번 다가올 상실의 시간을 속절없이 맞이할 뿐이다.

'봄밤'은 두 배우의 탁월한 연기가 인상적인 작품이며, 그것만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 한예리의 연기가 놀랍다. 파리한 얼굴, 초점 없는 눈빛, 흔들리는 몸으로 알코올 중독에 빠진 여자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인물의 아픔 많은 과거를 모두 삼켜버린 듯한 오라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가 겪었을 고통을 간접 경험하게 만든다.
한예리와 김설진은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한예리는 전통예술원 한국무용과를 나왔고, 김설진은 무용원 창작과 출신이다. 대학 시절에도 함께 무용 작업을 한 적이 있다는 두 사람은 몸으로도 각각의 인물을 인상적으로 표현한다.. 취한 상태로 김수영의 시를 읊으며 어지러이 휘청이는 영경의 모습, 제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굳은 몸을 이끌고 연인을 향해 기어가는 수환의 모습은 이 배우들이었기에 더 슬프고 아름답게 표현됐다.
시적인 영화다. 화면의 거친 질감과 생략된 장면들, 클로즈업 장면 등을 통해 생겨난 여백을 통해 슬픔과 상실, 사랑 등 꾹꾹 눌러 담긴 감정들을 감지할 수 있다. 2008년 '푸른 강은 흘러라'를 선보였던 강미자 감독이 16년 만에 내놓은 장편 영화다. 오는 9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