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만에 또다시 미국 로스앤젤레스 땅을 밟았다. 샌프란시스코와 함께 다문화 사회의 표본이자 한국 이민사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로스앤젤레스다. 글쓴이는 이곳에 발을 내딛을 때마다, 머나먼 타국에서 생존을 위해 애쓰던 교포들의 흔적이 보이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뭐든지 급변하는 대한민국과 비교해 볼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는 사실 크게 변화가 없는 편이다.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는 더더욱 변할 일이 없지만, 의외로 한글 간판과 안내문이 더 많이 눈에 띈다. 한인타운 근처뿐만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외곽에도 한글 간판의 약진이 확연하게 보인다. 산타모니카에도, 라스베가스까지 이어지는 도로 주변에도, 코리안 바비큐와 횟집, 그리고 한국어로 상담해 드린다는 변호사들의 광고판 역시 꽤 많아졌다.


미국 경제 사정도 그리 좋지는 않다고 하지만, 이 현상은 아마도 연말연시 세계를 달군 '오징어 게임'의 마지막 시즌과 함께, 최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위력일 수도 있겠다. 케이 컬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문화가 어엿하게 로스앤젤레스 또는 캘리포니아라는 다문화 사회의 주류로 편입한 상황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순간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일명 '케데헌'의 이야기를 여기에서조차 또다시 꺼내려는 건 아니고, 이처럼 화제가 되는 이슈들이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글쓴이의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

오징어 게임과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이 문화 이슈를 유행시킨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혹자들은 이 애니메이션을 우리가 자생적으로 만들어 수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타까워한다. 글쓴이의 생각은 그 반대다. 우리를 소재로 우리의 케이팝과 케이 컬처,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전통문화까지 읽어내는 외국인들이 고맙다. 이 유행은 케이 컬처의 진화가 이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안도감도 든다. 국가가 주도하는 것보다, 우리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외국인들이 자생적으로 한국 문화 알아가기를 주도한다는 이야기다.


케이팝 이야기를 바탕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녹여낸 미국산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영화가 시작한 지 오 분이 되지 않아 등장한다. 우리나라 대중음악 속에 등장했던 삼인조 여성 가수들의 역사를 아주 간결하게 서사 속에서 녹여내는 장면은 몇 번이고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굳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알아서 한국 대중문화를 공부하는 외국인들의 결과물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초반부터 등장한다. 그 이후에 등장하는 까치와 호랑이가 의외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세계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도 문화의 힘일 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는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국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중문화를 이끄는 자본의 힘이 특정 시대와 특정 지역에 힘을 미치던 시기가 얼마나 많았던가. 60년대부터 시작해 21세기 초반까지 미국에서 강력한 힘을 지녔던 일본 영화나, 8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정점에 도달했던 홍콩 영화가 좋은 예일 것이다.

우리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세계인의 관심을 끈 건 냉정히 말해 21세기에 들어서부터인데, 재패니메이션을 끝으로 더 이상 예전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일본 영화나, 21세기 들어와 힘을 못쓰는 홍콩 영화처럼 우리의 케이 컬처가 사그러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대중들의 관심이 멀어지면 거기까지인 것이다. 다행스러운 건 케이팝이나 케이 무비에서 멈추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전통문화 또는 한국 대중문화의 본질에 접근하는 외국인들의 관심이 다행스럽다. 그들은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하거나 유행에 편승하지 않는다. 우리는 꾸준히 콘텐츠를 제공하고 접근하는 길만 열어주면 된다.

과거 60년대 중반, 미국 포크 음악의 거장 피트 시거가 우리 민요 '아리랑'을 밴조 반주에 맞춰 영어로 번안해 부른 버전이 있다. 이때만 해도 우리는 세계 최대 대중음악 또는 대중문화 시장인 미국에 컨텐츠를 제공한 능력도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오징어 게임과 케데헌에 이어, 비티에스의 재결합이든 제 2의 케데헌이든 꾸준히 이슈를 만들어 세계인들에게 제공했으면 좋겠다. 이들은 좋은 것을 알아서 골라내는 사람들이다.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는 한, 우리가 굳이 작위적으로 애쓸 필요도 없다.

황우창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