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0월10일 전북 부안군 위도에서 격포를 향해 가던 서해훼리호가 침몰했다. 사진은 2023년 10월10일 전북 부안군 위도 서해훼리호 참사위령탑에서 '제30주기 서해훼리호 참사 추모 위령제'가 개최한 모습. /사진=뉴스1(전북도 제공)

1993년 10월10일 전북 부안군 위도에서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했다. 이 사고로 292명이 숨졌다. 해당 사고는 1953년 창경호 침몰 사고, 1970년 남영호 침몰 사고,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와 함께 한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 사고로 불린다.

서해훼리호는 왜 침몰했나?

승무원 포함 정원 총 221명이었던 서해훼리호는 사고 당시 승객 362명과 화물 16톤을 적재한 상태였다. 사진은 2020년 10월10일 서해훼리호 참사 27주기 추모제에서 마을 주민들이 희생자들에게 헌화한 모습. /사진=뉴스1

110톤급 철선 서해훼리호는 전북 부안과 격포를 1일 1회 정기 운항하는 여객선이었다. 승무원을 포함해 정원이 총 221명이었던 서해훼리호는 1993년 10월10일 오전 40분쯤 362명 승객과 화물 16톤을 적재하고 전북 부안군 위도 파장금항을 떠났다. 원래 정해진 정원에 비해 훨씬 많은 승객과 화물을 싣게 된 것이다.

전북 부안 격포항을 향해 가던 서해훼리호는 출발 30분 후인 10시10분쯤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돌풍을 만났다. 돌풍을 만난 서해훼리호는 회항하기 위해 뱃머리를 돌렸고 그 순간 파도를 맞아 곧바로 전복되고 침몰했다. 당시 서해훼리호에는 구명정 9개가 있었지만 이 중 2개만 작동돼 생존자들은 구명정 2척에 나눠 타거나 부유물에 매달려 살아남았다.


배가 침몰한 현장 인근에 있던 어선들은 조난 사실을 알리고 생존자 40여명을 구조했다. 사고 발생 1시간 후 강풍과 파도 속에서 어선, 헬기, 군경 함정이 수색 작업에 동원됐고 10월10일 밤 10시까지 생존자 70명이 구조되고 시신 51구가 인양됐다.

사고 당일 이후에도 수색 작업은 이어졌다. 10월15일 서해훼리호 선장, 기관장, 갑판장 시신이 침몰한 선반 통신실에서 발견됐고 11월2일에 신고된 마지막 실종자를 끝으로 292구의 시신이 인양됐다.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원인은 정원에 비해 많은 인원과 화물이 탑승한 것과 기상 여건이 좋지 않은 상황임에도 무리하게 운항한 것이 꼽혔다. 사건 당일 기상은 악천후였고 규정상 출항이 불가능했다. 승무원들은 출항을 꺼렸지만 일부 승객들의 요구에 이날 결국 출항을 결정했다고 전해졌다.


아울러 열악한 운용 환경도 사고 원인으로 지적됐다. 승객보다 운항 횟수가 적고 선박 회사가 의존하던 국가 보조금도 중단돼 운용 환경이 열악한 상황이 사고를 키웠다는 비판도 나왔다.

사고 발생 후 12월1일 합동조사반은 사고 원인 발표에서 선박 구조에는 문제가 없었고 정원 초과와 과적이 사고 원인이라고 밝혔다. 12월13일 해당 사건을 조사한 전주지검도 초과 승선과 과적, 운항 부주의, 방수구 부족 등을 사고 원인으로 발표했다.

당시 사고 희생자 중에는 위도 주민이 제일 많았다. 위도 주민 60여명이 이 사고로 사망했다. 유가족들에게는 합의에 따라 사망자 1인당 9910만원을 지급돼야 했다. 사망자 보상금은 총 282억원이었지만 서해훼리호 배상 능력이 10억원, 해운공제조합 73억원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국민 성금과 재해 의연금으로 나머지 금액을 충당해 유가족들에게 보상금이 지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