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자율주행 경쟁에서 '속도'보다 '안전'을 택했다. 정의선 회장이 최근 미국·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인정한 데다 SDV(소프트웨어중심차) 전환을 이끌던 송창현 사장이 물러나면서 전략 재편이 불가피해진 까닭이다.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중심으로 자율주행 기술 완성도를 높일 것으로 전망된다.
정의선 회장은 지난 5일 열린 '기아 80주년 기념행사'에서 현대차그룹의 자율주행 기술이 경쟁사 대비 뒤처져 있다고 인정했다. 정 회장은 "저희(현대차)가 좀 늦은 편이 있고 중국 업체나 테슬라가 잘하고 있기 때문에 격차는 조금 있을 수 있다"며 "격차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기 때문에 안전에 좀 더 초점을 맞추려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SDV 전략의 속도 조절을 시사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그룹의 SDV 전환을 주도해온 송창현 전 AVP본부장(사장)의 사임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관측된다. 네이버 최고기술책임자(CTO) 출신인 송 전 사장은 2019년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기업 포티투닷을 창업, 회사가 현대차그룹에 인수된 이후부터는 AVP(첨단차플랫폼)본부장을 맡아왔다. AVP본부는 현대차·기아 SDV본부와 남양연구소 소프트웨어 조직, 차세대 플랫폼 개발 인력 등이 속한 핵심 조직이다.
하지만 대규모 투자에도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6년간 포티투닷에 총 2조1504억원을 투입하며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나섰지만 상용화 단계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반면 테슬라는 감독형 FSD(완전자율주행)를 국내에 출시했고, 메르세데스-벤츠·BMW·혼다 등 글로벌 완성차들은 레벨3(조건부 자율주행) 기술을 양산차에 적용하며 한발 앞서가고 있다.
송 전 사장의 사임이 사실상 문책성 인사라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SDV 전략 조정도 불가피해 졌다. 조만간 예정된 사장단 인사와 함께 AVP 조직 개편도 진행될 전망이다. 하드웨어를 담당하는 R&D 본부와 소프트웨어 조직인 AVP 본부의 통합도 거론되고 있다. 송 사장 후임으론 외부 영입보다 내부 승진이 유력해 보인다.
지난달 테슬라는 미국·캐나다·중국에 이어 한국에 감독형 FSD 서비스를 출시했다. GM 산하 브랜드 캐딜락도 핸즈프리 운전자 보조 시스템 '슈퍼크루즈'를 적용한 '에스컬레이드 IQ'를 선보이며 자율주행 경쟁에 가세했다. 두 기술 모두 운전자의 감시가 필요하고 사고 발생 시 책임이 운전자에게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미국에서 인증을 완료한 미국산 자동차 5만대는 국내에서 별도 인증 없이 판매할 수 있어 안전 검증 공백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속도보다 안전을 우선하겠다는 정 회장의 발언은 전략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통해 자율주행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고 '안전성'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현대차그룹은 최근 차세대 AI칩 '블랙웰' GPU 5만장을 확보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정밀 자율주행 알고리즘과 데이터 학습 역량을 고도화해 기술 개발의 질적 향상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현대차그룹이 자율주행 분야에서 독자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테슬라·웨이모 등과의 협업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며 "송 사장 후임 선정과 향후 R&D에서 독자 개발 비중을 어디까지 가져갈지, 타사와 협업 비중을 얼마나 높일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엔비디아와의 협업에 대해선 "결과 도출이 언제 되느냐가 관건"이라며 "국내에서 테슬라 FSD의 파급력이 커지고 있는 만큼 지나치게 보수적인 전략만으로는 향후 자율주행 시장은 물론 전기차 점유율 경쟁에서도 밀릴 수 있다"고 진단했다.